꽃동네를 만드신 오웅진 신부가 수녀들에게 하신 말이란다.

"거지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돈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   잘 곳이  없는 사람?

받을 줄만 알 고 줄 줄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거지란다."

글쓰기/문학치료 (2007 여름) 워크샵 후기

1. 저널치료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점.


학회에서도 글쓰기 치료라는 이름으로 분과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곳곳에서 글쓰기 치료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저널이 무엇인지 저널쓰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널은 일기와 같다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에 공감하면서 그냥 [저널치료](학지사) 책을 봤을 때 가졌던 저널에 대한 생각이 직접 국내에서 유일한 "공인저널치료사"인 교수님의 가이드를 따라 방법을 경험하고 나니 몸으로 체득된다. 그냥 책을 봤을 때는 저널쓰기가 어차피 글쓰기 구나 생각하면서 글을 쓸라면 이런 방법들이 있구나라고 방법적인 면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보니 저널쓰기의 여러 방법이 단지 도구일 뿐 진짜 중요한건 어떻게 진실되게 지금, 현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접 경험해보는 거랑 책만 읽은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저널쓰기 방법을 활용하고 싶은 사람은 꼭 [저널치료] 전문가의 지도를 경험해보고 활용하기를 권하고 싶다.


2. 상담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문학적으로 표현된 심리학 용어들


처음 만남에서 교수님은 자신은 심리학자가 아니고 심리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워크샵을 들으면서 교수임이 표현하시는 용어는 문학적으로 달리 표현된 깊이 있는 심리학적 용어들이었다.(그렇다고 내가 심리학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는 아니다) 그것은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과 연륜을 가진 사람만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깊이의 언어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상담이나 심리치료라고 하면 거부감을 먼저 느끼는 우리네 정서에 비추어 볼 때 저널쓰기는 부담이 없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치료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교수님은 끝까지 심리나 상담치료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문학치료라는 다학문적인 상담치료를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없이 첫 걸음을 딛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3. 다양한 매체 활용의 놀라움 (문학치료와 글쓰기치료의 접목)


단순한 글쓰기치료가 아니라 무엇보다  교수님이 사용하시는 독특한 방법인 문학치료와 글쓰기치료가 접목된 방법과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를 가진 문학적 매체들이 놀랍다. 그림, 영화, 시, 글, 등 자료의 방대함과 그 자료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준비하셨을 교수님도 존경스럽다. 때로 독서치료를 진행을 하다보면 몇 가지 힘든 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내담자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책읽기를 별로 안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널쓰기에서 사용하는 영화의 한 부분, 그림, 책의 한 문구, 시들은 매우 공감되면서도 자료를 처음부터 모두 봐야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게 하여 좋았다. 독서자료를 활용 할 때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을 배운 기회가 되었다. 또한 다양한 글쓰기 방법들도 재밌다. 방법이 새로운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저널쓰기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접목되는지를 알게 되었고 글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나 마인드 맵 등 자신이 쓴다는 것은 심각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는 쉬운 방법들이 글쓰기에 응용되어서 좋다.  



4.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뀜


워크샵시간에도 말 한 적이 있는 데 나는 오래전에 일기 쓰는 것을 그만 둔 적이 있다. 왠지 글쓰기가 가지고 있던 무게감이 나를 진정으로 쓰지 못 하게 만든 것 같다. 글은 자기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거라고 하지만 나의 글쓰기는 무의식을 의식의 검열로 검열하여 쓴 것 같았다. 정말 글을 아무 생각 없이 한번 쓸 때 끊지 않고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써 보는 것, 그것은 아직도 얄팍한 의식의 끝을 잡고 나의 글을 검열하는 나에게 처음에는힘든 일이었지만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써 보고 나중에 다시 의식적으로 다시 읽어본 후에 써보는 후기 또한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진정한 저널 쓰기 방법이 잘 알려져서 글을 쓴다고 하면 거부감과 부담감이 먼저 드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로써 글쓰기를 애용하기를 바란다. 진정 부담 없는 무의식의 표현이 저널쓰기이다. 


 

저널치료를 접하고 나서 나의 변화


이 글을 쓰기 위해 저널치료 숙제로 낸 나의 글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새롭다. 어떤 글은 내가 왜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생각도 있다. 자기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후기를 쓰는 것은 후기에 후기를 계속 써서 끝이 없을 것 같다. 나의 시간에 따른 생각의 변화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빠에 대해 글을 썼었다. 되도록 솔직하게 쓸려고 했다. 한번 썼다고 해서 그 감정이 다  라진 것은 아니지만 한번 써 보자 머릿속에서 맴돌던 묵직한 무게감이 좀 준 것 같다. 뭐랄까? 계속 나의 화두인 것처럼 따라다니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첫 발을 내딛었다고나 할까?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써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나의 무의식이 어찌 변해가는지도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단지 지금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앉아 무언가를 하엔 불편한 몸이 되어서 나중에 몸이 좀 편해지면 시작해야겠다. 이제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줄었으니 몸이 가벼워지다면 더욱 쉽게 시작할 것이다.  막연히 언젠가 해야지 하던 것이 아닌 진짜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하고 싶은 작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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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문학치료와 저널치료에 대한 나의 생각

뭐든 경험을 하고 나면 바로 후기를 쓰는 것이 가장 신선하고 새롭다. 시간이 좀 지났고 또한 출산이라는 인생의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나는 온통 신경이 그 쪽에 가 있는 관계로 그 때 느꼈던 신선함을 다 전달하지 못 할까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저널치료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히 써 보았다.

*이 글은 집중 문학/저널치료 워크샵 (4일 8회, 2007년 7월)에 참석했던 한 참여자(청소년상담사 BS선생님)가 보내주신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까치둥지 하나,
벗은 몸
훔쳐본 것 같아
마음 쓸쓸하다

[해외 건강토픽]천식-관절염 치료에 글쓰기 큰도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드는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쓰면 건강이 좋아진다
는 연구결과가 "미국의학회지" 4월호에 실렸다.

미국 노스다코다주립대 심리학과 죠수아 스미스박사(연구당시 뉴욕주립
대교수)는 천식환자 70명과 관절염환자 56명을 대상으로 느낌이나 생각을
글로 적도록 한 결과 환자의 50%에서 상태가 좋아졌으며 매일 하루 스케
줄을 적도록 한 경우 24%에서 상태가 호전됐다고 발표.

스미스박사는 "천식환자는 2주 뒤부터 건강이 좋아졌으며 관절염 환자
의 경우 4개월 뒤 약간 좋아졌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는 "누구나 글을 쓰면 심장박동수를 줄고 혈압이 내려가며 면역기능이
강화된다는 다른 연구결과도 있다"고 소개.


from medcity.com 1999-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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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베이커의 연구에서도 글쓰기가 천식과 관절염 치료에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의 문학치료모임에서는  아토피 피부염과 여드름,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증상, 불면증, 숨쉬기가 답답한 경우, 심지어 얼굴의 주름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은 소규모 모임에서 나온 개별적인 사례이며 대규모 실험을 통해 나타난 통계자료가 아니어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보고 되는 변화는 역시 관계의 치료, 분노치료, 자존감 회복이었으며 자아발견, 창의적 자아 발견이었다.

photo by bhlee(c)2004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탐험의 끝은 바로
우리가 출발했던 그 지점으로 돌아오는 일
그리고 그 곳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
(T.S. 엘리엇- 4개의 사중주)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T.S. Eliot -Little Gidding-FQ)







미로. 어쩌면 결국 우리의 시작에 끝이 있고 끝에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은 처음의 시작과 끝이 더이상 아니다.

 

그만 아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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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혀 찬송을 하였을 때 옥문이 열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찬송이 가져온 기적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찬송할 수 있다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때 "기적"은 무엇입니까? 옥문이 열리는 게 기적이 아닙니다. 때로는 스테반처럼 야고보처럼 고스라니 순교당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그 억울하고 알 수 없는 고통 중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며 반항하고 회의에 빠져야 마땅할 상황에서 "찬송"을 할 수 있는 힘, 그 믿음이 기적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 속에 행하시는 주님의 기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뜻이 있으면 옥문이 열릴 것이고 뜻이 있으면 순교를 당할것이 아닙니까?

바울의 찬송은 옥문이 열리기를 간구하거나 기대한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옥문이 열리자 죄수를 다 놓쳤다고 당할 일이 두려워 간수는 자결을 하려합니다. 그때 바울이 우리가 여기 있다며 그를 말렸습니다.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그가 할일을 했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와 가족이 모두 믿고 간수는 그의 매맞은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기적은 바울을 탈출시킨게 아니라 한 가정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이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거니와 그런 나를 믿는가? 베드로가 흥분하여 예수님을 결박해 가려는 로마병사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 그가 병사의 잘린 귀를 도로 붙여주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그 기적을 행하시면서 왜 자신은 무력하게 매를 맞고 수치를 당하고 끔직한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세상에 온 이유를 완성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에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을 줄 아느냐... "

바울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생의 상황들을 "믿음"으로 받았을 때 주님은 바울이 사는 이유를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셨습니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 하셨던 다윗이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또 시험에 들고 하였습니다만 주님은 그를 만들어 가셨고 그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결코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그 사랑으로 내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일--선한 그 뜻"을 다 이루시기 까지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연금당한 (물론 지하감옥에서 나왔습니다) 5년동안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로마의 정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치인,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그 사람들로 인해 결국 로마가 후일 기독교 국가가 되게 됨을 바울은 모르고 숱한 고난 끝에 순교를 당합니다. 그는 가장 큰 실패자였지만 동시에 성공자였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수용하는 눈--그것이 생의 아이러니를 깨닫는 눈입니다. 생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이중시각을 줍니다. 즉 우리가 겪는 사건을 인간의 눈으로 볼 뿐 아니라 동시에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영원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혼의 눈"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은 우리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는 축복을 줍니다.

바울의 선언을 보십시오.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그가 "범사에 감사하라"합니다. "항상 기뻐하라"합니다. 이런 아이러니는 성경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남긴 잠언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게 헛되다"입니다. 세상에 새것이 없더라. 내가 지혜마저 구해보았으나 그도 헛되다...

당신이 그렇데 포기하고 싶고 버리고 싶어하는 '세상'은 그만큼 속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꾸 더 상처입는 세상이 아닙니까? 내가 관심없다고 자꾸 밀어내는 것은 사실은 상처받기 두려워 관심없다 먼저 밀쳐내며 돌아서서 혼자 아파하는 것아닙니까? 맞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무관심합니다. 참으로 냉혹하게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축이고는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외로운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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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우연히 가롯유다에 대한 한구절을 읽다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예수를 판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뉘우치고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내가 무고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며 예수 판 값으로 받은 은 30량을 돌려주려하자 그들이 말하지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마태27) 참 무서운 말입니다. 네가 그 죄값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악한 행위를" 부추기고는 책임은 져주지 않는 세상... 우리는 그 세상을 쫓아가느라 지칩니다. 그것 세상이 준 보상은 은돈 30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버리고 싶은 그런 세상을 버리는 길은 하나입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다시 말하거니와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악을 행하는 자들도 모두가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불완전함이야말로 실존적 죄를 가르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임을 이해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당하는 모든일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세상이 그럴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용서하고 상대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큰 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들은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기전 제자들을 위한 긴긴 기도에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분명 고통을 인정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믿음이라(요한 1서)

진정 진정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아무곳에도 우리를 이르게하지 못할 허망한 생각 대신 진리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때 진리는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인격체"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내가 곧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우리의 영혼과 생각이 양식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기에 자신을 떡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이유도 그때문입니다.

당신은 정말 계속 자신을 그 아픔속에 방치하고 싶은건가요? 정말 낫고 싶기는 한 것입니까? 아프지 않을까봐 두려운건 아닌가요? 진리속에서 아픔이 진정한 생산적인 아픔인 것을 알지 않나요? 그렇지 않은 아픔은 나를 어느곳에도 데려가주지 못합니다. 퇴행과 허망한 챗바퀴, 두려움과 끝없는 도피밖에 없습니다.

용감히 뒤돌아 서서 뛰어 나오길 바랍니다. 그 흐름에서 표류하지 말고 날아 올라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더 이상 당신의 아픔을 바라보는 일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픈 당신을 보느라면 너무 내가 아픕니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릴케- '두이노의 비가' 에서)



[가엾은 내 손 -  최종천]

나의 손은 눈이 멀었다
망치를 쥐어잡기보다는
부드러운 무엇을 원한다
강요된 노동에 완고해지며
대책 없이 늙어가는 손
감각의 입구였던 열개의 손가락은
자판 위를 누비며
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손의 시력은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다
열개의 손가락에서 노동은 시들어버렸다
열개의 열려 있는 입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
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니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가을은 눈의 季節-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落葉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도 순수한 言語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落葉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2007. 1. 7.

 

 

 

 

 

 

Kay's poetry salon에 갈때 만들어서 가져갔던 선물. Kay는 유난히 사과를 좋아했다.
사과에 피넛버터를 발라서 점심으로 먹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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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 기형도의 시를 번역해서 소개했고 나의 시를 읽었다.
Christmas Memory
- by Bh Lee

We did not believe in God or
the Savior baby Christ that time
but we thought vaguely that we had to be
part of the celebration.
My sister and I cut seven paper colors
to make various string ornaments.
We hung them around the walls and ceilings.
We had no Christmas trees;
We could not afford to buy beautiful Greeting Cards,
but we enjoyed every moment of relishing the Christmas spirit
making Christmas cards in an abandoned chilly little room
though we have not many friends to send them all.
The room was the whole wide world for us at Christmas
dreaming of white downy warm snow falling down
covering our shivering bodies like blankets.
We were pre-matured to expect a Santa
coming down from the chimney,
yet we still used to grope the pillows secretly
while we feinted to sleep, in vain.

However, the winter was always colder than our fantasy;
The chilly little abandoned room was too big for us
to decorate and cover up
with our little paper rainbow trinke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