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풍경'에 해당되는 글 71건
나의 가족(6) 선생님과 할머니, 그리고 언니, 그리고 나 2 | 2025.06.04
'선물'에게서 온 선물 | 2025.01.25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2024.12.03 코스모스- 이형기 4 | 2024.11.18 선인장 사랑 5 | 2024.09.29 추억의 책 갈피, 내 마음 갈피 8 | 2024.09.24 내 마음의 첼로 - 나해철 1 | 2024.08.17 물새 | 2024.07.30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7 | 2024.04.30 Ne andro Iontana 7 | 2024.04.05 크리스마스 | 2023.12.24 악몽 2T3 | 2023.12.24 지켜야 할 약속 1 | 2023.12.12 살아있는 건 멋진 거야 | 2023.11.30 나는 왜 쓰는가- 내가 그때 거기 있었다 1 | 2023.11.19 투병중 2 - BHLee 2 | 2023.09.09 넌 참 이상해... | 2023.08.15 나의 가족(1) 엄마와 모란- "찬란한 슬픔의 봄" 4 | 2023.05.01 새- 마종기 3 | 2023.03.12 길을 묻고 싶다 | 2022.09.02 선생님과 할머니 2010. 3. 12 금. 어제 언니가 내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 초저녁에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낮에도 전화 안 받고.... " "아. 어디 다녀온다고 했잖아. 중국출장." "응. 그건 엊그제 돌아 왔지. 그래서 어제 밤에 통화도 했잖아. " "아. 그랬나.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어." 언니가 무료해서 낮에도 전화 했구나..... "저녁 먹었어?" 언니가 묻는다. "지금 먹으려고..". 막 식사를 끝냈지만 거짓말을 한다. 고속도로로 출퇴근 하는 학교에서 종일 복잡한 일로 지쳐 돌아온 밤,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주면 되는데, 간단한 대답 몇 마디만 해주어도 되는데 그것도 버거워 혼자 있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 그럼 어서 식사해. 밤낮 이렇게 한 밤중에 저녁을 먹으니 어떻게 해. " "늘 그런데 뭐. 언니 이따가 또 잠 안 오면 전화해. 나는 2시에 자니까 걱정 말고." "알았어."
어제 언니와 통화한 일을 쓰다보니, 언니 때문인지 얼마전부터 떠오르던 기억이 있다.
청주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전학 온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손영자선생님. 지금은 어디계시는지, 생존해계시기는 하시는지.... 오빠가 동생들을 다 학교 보내고 돌봐준다는 것에 감동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교회도 가시고(우리집은 불교집안이었는데) 늘 자신의 집에 데려가 주셨다. 선생님은 이혼인지 사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홀로 반신이 마비된 뼈만 남은 70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숙명여고 다니는 딸과 함께 3식구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예뻐 하셨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툭하면 선생님 댁에 가서 할머니 방에서 말동무 해드리면서 그 집에 있는 위인전기며 책들을 읽었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뺨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듯이 노인들의 뻣뻣한 살가죽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할머니 방은 중풍병자의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늘 깔끔하게 참빗으로 머리를 넘겨 쪽을 찌고 하얀 모시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계셨지만 방에서는 알 수 없는 고통스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모두 ‘학교 다녀 왔어요’ 하고 문 열고 한 마디 하고는 나가버리는 쓸쓸한 방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식구들의 발소리만 기다리셨을 텐데. 그런 할머니의 냄새나는 방에 나는 방학 때면 종종 찾아가 한 나절 곁에 앉아서 배 깔고 누워 책을 보았던 거 같다. 할머니는 그게 좋아서 나만 가면 마비되어 어눌한 입으로 우우 거리시고 기억자로 곱은 손으로 손짓을 하시고는 동그랗게 끝을 말아서 고리처럼 굽혀놓은 파리채 손잡이로 곁에 놓인 작은 장을 열고는 그 속에 있는 곶감이나 다른 먹을 것을 꺼내 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또 일하는 식모가 그만 두겠다고 한 것이다. 선생님은 친정어머니 방문 앞, 마당에서 어린 나에게 호소를 했다. “다 할머니 때문이야. 똥오줌 받기 싫어서 아무도 붙어 있으려 하질 않아.”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해야 하고,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고, 일할 사람은 오고 싶지 않다고 하고...... 선생님도 나름대로 삶의 서러움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남편도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좀 많았을까. 울음이라도 터질 듯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분노인지 절망인지 원망인지 설움인지 모른 심정을 초등학생 철부지 제자에게 호소하는 선생님과 방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실 할머니 사이에서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 가끔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선생님이 나를 늘 집에 데려가신 이유는 나를 이뻐하셔서이기도 하지만 빈집에 할머니 혼자 둘 수 없어서 나를 할머니 곁에 두고 외출하셨던 것 같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어리숙하고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어떤 땐 그 속이 다 보여도 그냥 속아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니까. (영악스럽게, 아니면 자신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바보?) 내가 다음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학교 후배가 된 선생님의 딸은 얼굴에 주근깨가 약간 있었고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약간 통통하고 키가 컸던 언니로 기억이 난다. 내게도 잘해주었지만 살갑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할머니 때문에 귀찮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던 언니였었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다 빤히 눈치채고 계셨을 텐데 얼마나 외롭고 서럽고 또 구차했을까? 당신이 원해서 그런 병이 드신 것도 아닌데.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은 죽은 자와 방불한데 숨 쉬고 살아있는 수치심과 그럼에도 살고 싶은 맹목적인 욕망은 무엇이며, 아니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무기력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 홀로 미지의 세계로 사라지는 공포일까?
잉여인간...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맘대로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이상하게 얼마전부터 그 할머니가 기억난다. 철없이 그냥 찾아와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집어주는 곶감을 먹어드린 것뿐인 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예뻐하시던 정에 주린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리고 철부지 초등학생 제자 앞에서 울음이 터질듯 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삶의 무게를 호소하시던 선생님의 고달픈 삶과 외로움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갑자기 그 선생님은 (어떤 의미로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길 바라셨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들 모두 속에서 나 자신의 여러 편린들을 본다.
2010.3.12. 금. 흐림. 바람이 심하다.
(언니는 하늘나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뉴욕에서 한국으로 가보지도 못한 때 어린아이처럼 뼈만 남은 몸으로 홀로 떠나셨다. 이런 글이라도 남아서 언니의 기일인 엊그제 다시 미안한 마음을 기억한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032019
------------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만일 내가 단 한 사람의 마음이 부서지는 걸 막을수 있다면 만일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거나 한 사람의 고통을 식혀주거나, 아니면...
-에밀리 디킨슨
오늘 아침에 반박자 걸음으로 일어나 사랑하는 17년 전 제자 제니의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내가 문학과 글쓰기를 활용하는 문학치료사와 상담사의 길로 가도록 나를 향한 뜻은 긴 세월 준비 시키신 듯하다. 사랑스럽고 귀한 제니. 사랑과 배려가 넘치고 미술 영어 작곡 피아노 봐이올린 첼로 노래... 못하는 것이 없었던 제니. 그런데 난 그의 지치도록 타오르는 열정 뒤에 숨겨진 작은 어린아이, 외롭고 두렵고 힘겨운 아이를 보았다. 문학 수업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제니. 나중에 알고 보니 수업때마다 눈물이 나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던 제니. 수업이 끝나면 친구도 만나고 싶지 않고 혼자 있고 싶었고 긴긴 일기를 쓰게 되더라는 제니.
졸업 후 캔버스 앞에서 한 점도 찍을 수 없다고 어느날 문학치료를 받으러 찾아왔던 그녀. 진정한 자신을 찾고 생애 가장 중요한 선택을 했던 그녀.
이제는 자신만큼 재주꾼이고 사려깊으며 사랑스런 아들의 엄마가 되어 사랑하는 남편과 알콩달콩 행복한 그녀. 여전히 열정적이고 따듯하고 멋진 선생이 된 그녀. 나의 소중한 제자, 제니!! 글씨마저 예술인 그녀가 도장도 여러개 새겨 함께 보내주었다. 고마워 제니야!! 넌 늘 감동이야. 네가 가장 소중한 '선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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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늦은 아침, 창을 열자 제법 센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밀려 들어온다. 바람...하면 어떤 바람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를까? 오늘처럼 차가운 겨울바람? 산에 올라 땀을 식히던 그 맑고 시원한 바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얼마나 맑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너무나도 소중한, 또 그래서 끙하고 가슴 저려오는 고백인가? 큰 바람이 불어야만 바람을 느끼는 우리들인데. 뿌리 깊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도 아니고 작은 이파리 하나가 흔들리는 그 작은 바람에도 그는 아팠다 한다.
오늘 찬바람 스치는 거리를 지나며 동주의 이 맑은 시구절을 습관처럼 외다가 아주 오래 전 30대인가, 어느 날이 떠올랐다. 지친 퇴근길에 일몰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던 기억ㅡ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 120324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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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이형기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ㅡㅡ 가을하늘이 숨이 막히도록 푸르게 점점 높아만 갑니다. 어느새 한해도 이 가을이 질 때 함께 저물어갈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물처럼 내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리에겐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이 시간의 굽이굽이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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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사랑 - bhlee (2007)
괜찮아...
그러니 네 상처투성이 온몸 그 가시로 홀로 아파하지마 도망가지마
맘껏 내 품에 안기렴 내 사랑
MP 02/22/2007
너무 슬프고 아프고 두려워서 꿈에서 깨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022207 참 많이 아팠던 시절이었다. 이젠 기억 저편에 있는 그런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journal의 힘이고 치유인 것 같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추억의 책갈피, 내 마음 갈피>
책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려서부터 책을 사면 전공서적이 아닌 경우 대부분 그 책을 살 때 언제 어떤 마음이었는지 표지 안 쪽 첫페이지에 몇 줄 적곤 했었다. 수도없이 떠나보낸 책들. 그들을 다 버리려 할 때마다 그 몇 줄 글과 함께 한 번씩 책갈피를 스르륵 들쳐보면 줄쳐진 곳, 여백에 적혀있는 책과 대화한 나의 단상들을 만난다. 그 때의 시간과 추억이 소환되고 잊었던 그 시절 내 마음 갈피가 열린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옛날 젊은/어린시절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추억을 소환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겐 누렇게 바랜 책갈피에서 발견하는 밑줄쳐진 글이나 메모와 나의 생각들이 추억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상실감이 더 크기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 치열했고 순수했고 고민했구나. 이제는 잃어버린 그 시절의 나의 빛났던 “언어“가 아프다.
지난 겨울 너무 많이 아파서 꿈도 무엇도 다 힙겹고 무의미하고 버거웠던 때, 방을 가득채운 서류더미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차마 나는 열어보지 못하고 도우미 아줌마를 시켜 수도 없이 버리고 버리고…방가득 쌓인 15박스 넘는 내가 정리했던 글들과 공부한 내용들을 버리고 나서 일주일 넘게 이유 없이 끙끙 앓았다.
내가 간직했던 수많은 영화사에 중요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명작 영화 비디오도 씨디도 특수쓰레기 대형봉투 6자루정도 버렸다. 어딘가 기증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찾아도 모르겠고 기력이 없었다. 저질 체력 앞에 모든 꿈과 열정이 다 허무하고 고통스럽고 부담되어서 다 결별하고 싶었다.
지난 것은 지난 것대로 그 때를 살았던 것이니 되었지… 라는 스스로의 위로는 이번에는 가슴 속 빈 공간을 채워주진 못했다. 사실 그 빈 구멍이 무엇때문인지 나는 안다….
이제 다가오는 추수의 계절 나는 오히려 또 비워야지 생각한다. 아직도 남은 책들과 서류들과 모든 물건들을 다 정리해야지…. 이별은 면역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젠 그래도 좀 쉽겠지?
ㅡㅡㅡㅡ
![]() 오늘 우연히 제목이 새삼 마음에 들어와 버리려 모아둔 책들 속에서 들쳐본 <현재라는 이름의 환상>. 다른 책갈피 메모보다 평범한 메모긴 하다. (빛바랜 줄 친 부분들도 지금 읽어보니 새로운 눈으로 읽힌다. )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 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온 몸을 흔들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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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새]
여름 바다 보다 겨울 바다를 더 좋아하는 건 바다는 그리움이어서 그런가 보다 영원히 바라보기만 하는 나의 눈먼 자유
내 곁에 내려와 넘실대는 하늘 내 안에서 나만큼 낮아지는 저항 못 할 부름이건만 그 푸르름에 몸 맡기고 익사할 용기 없어 여태 더듬거리고 머뭇거리며 마지막을 유보하고 있다
오늘도 산산조각 난 땅 끝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하늘 끝에서 이내 지워질 편지만 터벅터벅 남기며 아쉬워 아쉬워 돌아보는 물새가 된 나
080103 bhlee MP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Vincent van Gogh- Cherry trees in full bloom -----------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여러겹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 나무가 까닭 없이 불편하였습니까. 멀리로 멀리로 지나쳐가며 혼자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 스스로에게 그 나무 탓을 했나 봅니다. "내가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다 말하기 불편하였을까...... 그러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나무를 멀리서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멀리서 멀리서 보면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그동안 눈이 부셔서 직시하기 불편했을까요? 그리고 그 여러 겹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서라고, 하나의 꽃빛을 피우기엔 너무 많은 소망과 열정이 있어 켜켜히 마음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가 참 외로웠겠구나.......... 깨달았다 합니다.
그러다 또 생각합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 외로웠을 것이지만 그 나무는 어쩌면 외로운 줄로 몰랐을 거라고. 그렇게 고고하게 홀로 제 열정을 따라 여러 꽃빛을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외로운 줄도 몰랐을 거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또 알았다 합니다. 그 오랜 시간 당신은 그 나무를 떠나지도 못하고 멀리서 멀리서 계속 지켜보았군요. 외롭게 피워 올린 꽃잎들 다 흩어져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에야 그 나무 이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려 겹 꽃잎 같은 마음 다 흩날아가버리고 맨 몸으로 선 그 시간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의 그늘에 앉았습니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진 나무라 생각하던 그 나무 아래, 당신은 그제야 다가가 앉았습니다. 심심한 얼굴을 한 나무 곁에.
알 수 없네요. 그 나무가 심심한 얼굴을 하고 나서야 당신은 편하게 그에게 다가간 것인지 다가가 보니 외로운 줄도 몰랐을 듯, 열심히 겹겹이 피워내는 마음을 가진 그도 어쩌면 참 심심한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심심하고 외로워서 더 여러겹 꽃빛을 피워 제 맘을 감싸 입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은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제, 어둠이 머지않아 내려올 소리를.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다 하십니다. 그 몇 겹의 색깔을 읽어 보셨을까요. 까닭 없이 부담스러워 멀리서 멀리서 떠나지도 못하고 지켜만 본 당신, 당신도 그 나무처럼 외로웠나요?
그 저녁 당신이 찾아와 앉았던 그 나무, 여려 겹 꽃잎 다 흩어 보낸 그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수천의 꽃잎이 비명도 없이 떨어져 날아와 내 마음에 쌓입니다.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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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 by bhlee06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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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라는 문구가 있는 카드를 보냈다. 그래서 생각난 일.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악몽 2T3
날 품어주던 오늘이 돌아 누었다.
나 꿈을 꾸었어 너무 어둡고 추웠어 진눈깨비 흩어지다가 어느새 주먹만 한 흰 눈이 아득한 바람을 타고 숨도 쉬지 않고 내려왔어 내 숨도 막았어
누군가에 도움을 청했지만 흩날리는 눈처럼 가볍게 섧게 날아갔어 눈길조차 없는 파닥이며 맴도는 작은 어둠이었어
눈 속에 갇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허리 끊어진 엉뚱한 몇 마디 투명한 단어들만 간신히 웅얼거렸어 악몽이었을까.
침상에 모로 돌아누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아, 돌아눕는 얼굴 없는 얼굴 눈 코 입 그려 넣지 않은 헝겊 인형 같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 또 다른 꿈으로 지워질 또 다른 오늘이 시린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선물상자를 들고 서서 나를 깨운다.
일어나야지 눈을 크게 뜨고 악몽을 받아들이는 건 용기 있어 아름다운 결단이야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용기 폭설을 떨치고 날아보는 작은 노래야
일어나야해 또다시 지워질 얼굴을 그려야 해
언젠가 다다를 오늘의 끝은 눈부신 현실일 거야
- BHLee
MP 07192007
--------------- 나는 꿈을 자주 꾼다. 하지만 좋은 꿈은 젊은 시절 외에 꾸지 못한다. 내내 그런 꿈을 어김없이 꾸었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 꿈 중 예를 들면 어느 날 꿈에서 내가 수술대 위 눈부신 전등 아래 누워있고 옆 테이블에 내 손과 발이 장갑과 부츠처럼 잘려서 놓여있었다. 너무 생생해서 일기에 그림으로 그렸었었다. 그리고 잊힐 때쯤(한 달 후쯤?) 그날도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새벽에 학교 가는 길.... 전철역으로 내려가는 층계에서 두 번을 굴렀다. 손목과 다리 모두 다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새벽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마침 급한 듯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날 도와주려고 애를 쓰시며 연락처를 묻는데 가족은 미국에 있고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가 된 패닉상태. 지나가던 청년이 --그 급한 새벽출근시간에--나를 업고 길 위로 올려주고 나는 간신히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던 거 같다.
암튼 내 악몽은 내 마음이 상태뿐 아니고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는 내 내면의 지혜의 경고였으나 그 경고는 피할 길이 없었다. 지난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이디푸스처럼 꿈을 피해 도망가는 선택이었는데 꿈을 향해가는 선택이 되었고 아무 일도 아닌데 상상이상으로 심히 다치고 수술하고 아직도 회복 중이다. 그 외 늘 반복되는 꿈도 몇 가지 있다. 그 이유를 나는 스스로 분석도 하고 알고 있다. 그 꿈이 차차 빈도가 낮아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꿈은 내게 악몽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악몽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메타포가 되기 시작했던 거 같다. 정말 삶이 외롭고 버겁고 힘들었던 아주 오래전에 쓴 이 시도 산더미 같은 그 간의 공부했던 것들을 버리던 중 공책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제목의 의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시가 들려주는 내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제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이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가끔 악몽을 꾸고 나면 나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묻고 싶다.
-언제 이 악몽에서 벗어나 행복한 꿈을 꿀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행복하면 꿈을 꾸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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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 R. 프로스트 (1874~1963)>
여기가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으니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여기 서서 그의 숲이 눈에 덮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일 년 중 가장 캄캄한 저녁 가까운 데 농가도 없는 이곳 숲과 얼어 붙은 호수 사이에 가던 길 멈춰 서있으니 내 조랑말은 분명 이상하게 여기나 보다
무슨 문제라고 있느냐고 방울을 한번 흔들어 본다. 그 밖에 들리는 다른 소리란 오직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스치는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bhlee역)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by Robert Frost>
ㅡㅡ 시인은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날 저녁(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눈 오는 숲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 숲의 깊고 어두운 아름다움에 끌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 위에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이리 들어오렴... 손짓하며 부르는 듯한 숲!!!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겨울 저녁은 어떤 저녁일까요? 나의 마음이 가장 춥고 어두울 때는 어떤 때일까요? 그럼에도 홀로 길을 가던 긴 여정 여기서 멈추고 들어가고 싶은 그 곳. 깊고 조용하고 어두운 그러나 아름다운 그곳의 유혹—그곳이 그냥 깊고 아름답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분명 그곳이 어둡다(dark)말합니다. 어두운 곳, 눈이 내려 덮이고 있는 깊은 아름다운 숲에서 그가 발견한 어둠, 그 어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긴긴 인생의 여행길, 어두운 겨울밤과 같은 먼먼 길을 홀로 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 아니 몇 번쯤 그냥 그 고요한 곳으로 모든 것 다 덮는 눈 속으로, 망각의 눈 속으로 들어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인도 그랬을까요? 한참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이 묘한 텐션 속에 시를 읽는 나도 빨려든 그 순간 영문 모르는 작은 조랑말은 뭐가 잘못 되었나 방울을 울리고 시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고.
힘겨워서 고요하고 깊은 아름다운 어두움의 유혹 앞에 잠시 망설이게 될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약속! 그리고 가야 할 남은 길에 대해 기억해야한다고 일깨워줍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이렇게 방울을 울려주는 작은 말(馬)을 생각해봅니다.
--------------------------------- 나의 조랑말의 방울소리 082020: 요즘은 내가 살면서 난 무엇을 남기며 살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생각해본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정말 무지무지 많은데 왜 이렇게 기력이 없는지, 왜케 자꾸 몸이 가라앉는지 한해의 2/3를 허망히 보내고 이대로 주저앉아 “나와의 약속/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키고 의미 없이 남은 삶을 사는 건 아닌지 슬프고 두렵고 야속하다.
그런데 어제는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문자를 몇 개 받았다. 이게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과 지켜야 할 약속을 다시 일깨우는 말방울소리인 것일까?? 그 많은 세월 동안 부족한 내가 제자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받은 편지와 분에 넘치는 사랑을 기억해 본다. 내가 건강이 정말 많이 안 좋았던 어느 해 일 년 간 매주 연구실 문 앞에 말없이 두고 간 녹두죽과 과일, 얼려놓고 매일 먹으라고 하나하나 작은 용기에 포장해 건네주던 녹두죽과 김치, 때로는 밤늦게 일하던 내 방문 앞에 아무말없이 걸어두고 간 고구마. 때로는 노크만 하고 두고 간 꽃다발. 아니 몇 십 년 전, 사은회 때마다 다른 교수들 몰래 내 선물은 내 연구실이 건조하다고 (그때는 낡은 건물에 석유난로를 피던 시절) 가습기를 따로 준비해서 슬그머니 건네주던 학생들, 담요나 베개 같이 정말 세밀하게 살펴서 몰래 준비해주던 학생들. 내가 다리와 허리를 굽히지도 못하게 통증에 시달릴 때 말없이 서서 신을 신을 수 있게 긴~ 구둣주걱을 사다 준 제자. 수업 중에 핫팩을 준비해 주는 제자. 말없이 의자에 방석을 놓아주는 제자. 내가 좋아한다고 늘 일부러 한방 찻집에서 대추차를 사서 수업 전에 가져다 놓는 제자. 중국에서 출장 다녀올 때마다 대추를 사다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가져다주던 제자. 일 년 내 철마다 농사지은 너무나 맛있는 김치를 보내주는 10년 넘게 오래된 내담자 외국에서 보내주는 내담자의 선물들. 예전에 고속도로 운전하며 출퇴근할 때는 오늘 날씨가 추운데.... 눈이 오는데.... 비가 오는데... 안개가 낀다는데... 운전 조심하시라고 전화해 주던 제자들. 어떻게 다 이루 말할 수가 있을까? 책으로 엮어도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의 가장 훌륭한 삶의 동반자였으며, 실수 많고 부족한 나의 참 스승이었다. 나는 참 많은 빚을 진 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수없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상처받았지만 정말 수도 없이 오해도 받고, 그걸 견디며 살았지만 감사할 일이 더 많다........라고 나의 작은 말(馬)이 방울을 울리며 나의 갈 길을, 지켜야 할 나의 약속을 일깨워 준다.
힘들고 지칠 때, 나만 혼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울 때 수없이 받았던 이런 작은 격려들, 아니 그보다, 내가 함께 해줄 수 있는 마음이 아픈 분들, 아니,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직도 깊은 곳에서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그런 것들을 기억한다. 자꾸 머물고 싶고 잠들고 싶은 깊고 어둡고 아름다운 눈 오는 숲 곁에서 나도 방울소리에 깨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이 눈 오는 겨울 길을 계속 가야한다. 날 깨워주는 작은 조랑말의 방울소리에 감사드린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과 인연들에 감사드린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 Dylan Thomas ------------------- <오늘 우연히 받은 편지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떻게 지내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안부 여쭙니다^^ 너무나 늦은 시간인 줄 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메시지 드려요~~ 제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그중 문학의 중요성을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읽으려고 황소와 도깨비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갑자기 교수님과 함께 했던 오셀로가 생각나더라고요.. 두 작품은 상황도 배경도 다른 내용이지만 오셀로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교수님이 설명해 주신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표로 삼게 된 것이 Trifles라는 작품이에요.. 교수님과 함께하던 시간에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고 현재도 가장 좋아하는..^^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많이 된 작품이에요. 문학이라는 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 혹은 앞으로 경험할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너무나 중요한 보물이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특히나.. 결혼해서 모르는 남이 가족이 되면서 특히나.. 문학을 배우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 감정과 생각을 잊지 않고 전하고 싶어 두서없이 메시지 드렸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지치실 때도 있으시겠지만 교수님 덕분에 마음속에 보물을 품고 살아가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20년 전 제자 RR> ㅡㅡ 교수님을 처음 뵙던 날~ 2018년 8월 23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속 고통의 깊이를 모른 채 왜 이렇게 삶이 공허할까 싶었던 순간, 교수님의 강의에서 영혼이 맑고 마음이 따뜻한 그리고 참여자 모두를 품어주시는 교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과 열정사이에서 이성적 가르침과 열정적 사랑을 보여주시는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특강을 듣고 무척 높은 연봉의 전문직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온 정말 소중한 선생님의 글> ㅡㅡ 교수님~ 맛있는 거 먹을 때면 교수님 생각이 자꾸, 보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선배에게 교수님 주소를 받아놓고도 후딱 실행을 못 하고 있었네요. 교수님, 맛있는 누룽지 보내드릴게요. 입맛 없을 때 누룽지가 좋더라고요.
그리고, 저 00대 대학원 상담심리학과 박사과정 하고 있어요. 아직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은 아닌 듯하고, 시간이 아까워서요. 지난 1학기 수업받으면서 교수님 생각이 더 많이 났어요. '우리 이봉희 교수님같이 열정이 있는 교수님이 없구나'하고~. 공부하면서 교수님 말씀이 이런 거였구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경험도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자주 뵐 수 있으련만. 건강도 잘 챙기시고, 식사도 잘 챙기세요.
<나에게 배우려고 먼 곳에서 천안으로 이사까지 ㅡ아이도 전학시키고ㅡ와서 공부했던 샘. 논문 쓰고 석사학위 따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암이 발견되어 수술했었지. 문학치료의 특수함 때문에 여기저기 좋은 곳에 취업이 되어서 일하고 계신 선생님. 내가 좋아하는 대추차를 무겁게 낑낑 사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선생님.>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Life is fine as good as wine.- L. Hughes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수술 후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해서 감옥처럼 갇혀 불편하게 지낸 지 3개월이 넘었다. 그래서 지난 한달 반 동안 도우미 아주머니를 통해 20 상자 넘는 나의 글들과 공책, 공부한 귀중한 자료, 그 외 여러 자료들을 다 버렸다. 정년퇴임할 때도 연구실에 있던 버리고 버려도 끝도 없는 수많은 자료와 책들을 버렸었는데.(청하지 않았는데도 찾아와준 대학원 제자들이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나 고마운 샘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뒤에 남은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정리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아주머니도 놀랐다. 자신이 10년 넘게 일하러 다녔고 그중에 교수들도 많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했다. 그래도 아쉬워서 남겨둔 것들도 아직 많다. 삶의 무슨 답을 찾고자 이렇게 끈질기게 나는 읽고 적고 했을까? 아니, 뭘 그리 끝없이 혼잣말을 여기저기 끄적였을까? 버린 것 외에도 내 외장하드에 남겨진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또 언제 버려야하나..... 겁이 나서 열어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 글들 속에서 나의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열정과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기에.
그때 그곳에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2002)
“나중에 책을 내려고 그러시지요?” 어떤 교수님이 여행 중에 내가 항상 무언가 써넣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 쓰기 습관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 내지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왜 난 늘 무언가를 쓸까? 쓰면 어떤 결과물을 남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쓰고 말면 그뿐인 걸 계속하는 건 의미 없는 우스운 일 아닌가? 이런 자의식이 생기면 무언가를 쓰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는 무언가를 쓰고 싶지 않다. 습관적인 글 쓰기는 일기를 쓰는 일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글짓기 대회라면 늘 우리학교 대표로 나가서 교내, 시, 도 주최에서 상을 받아서 전교생이 보고있는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상을 받곤 했다. 줄 뒷자리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부르면 깜짝 놀라서 뛰어나가곤 했었다. 기쁨보다는 쳐다보는 아이들 사이를 얼굴이 빨개져서 뛰어갈 때의 그 계면쩍음과 난감함 때문에 교장선생님이 계신 단 위까지가 10리나 되는 듯 무척 멀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TV가 없던 1960년대 초,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은 라디오에서 5시에 시작하던 어린이 시간의 어린이 연속극과 학원이라는 잡지 뿐 이었다.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거기에도 내 글이 여러 번 실렸던 것 같다. 한번은 라디오 어린이 극에 내가 역할을 맡아서 방송에 나온 적도 있었다. 너무 가슴이 뛰고 부끄러워서 방 밖으로 도망가서 창문밖에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때 쓴 글들을 하나도 모아놓지 않았고 지금도 여기저기 실렸던 수많은 내 원고를 기억도 못할 뿐 아니라 모아 놓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책을 내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글쓰기를 하고 있었던 거가 맞다. 내가 초등학생 일때 그 당시 학생들도 만화책을 좋아했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김경언 선생의 <의사 까불이> 시리즈였다. 박종래 선생의 <엄마 찾아 삼 만리>나 독립투사 이야기 류(類)의 만화는 굵은 먹빛 선으로 선명히 가슴에 자국을 남기는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얼굴이나 처연하게 흩날리는 옷고름 자락과 흩어진 머리카락만 봐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었다. 그 이미지가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는 걸 보면 당시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재기 발랄하게 시대를 꼬집고 세상의 부패에 메스를 가하는, 그리고 가늘고 가벼운 펜의 터치로 그려진 <의사까불이> 쪽이 훨씬 부담이 없었는지 모른다. 김경언의 만화 중에는 지금도 기억하는 많은 장면이 있지만, 특히 고착증세를 버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라고, 바로 보기 위해서는 한번쯤 뒤집어 바라보라고 시각의 균형을 늘 강조하는 나의 문학 수업에서 종종 인용하는 한 장면이 있다. 가난한 구두닦이 소년이 어느 날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길을 가다가 문득 허리를 굽혀 다리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거꾸로 뒤집어 보니 그리 슬플 것도 없는 코믹해 보이는 세상이어서 소년은 하하 웃고 다시 씩씩하게 하루를 향해 걸어가는 내용이었다. 1960년대 초에는 오늘날처럼 학생의 우상이 되는 연예인은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10대 가수는 내가 몰랐기 때문이겠지만 내 기억엔 없었다. 내가 듣는 노래는 가끔 오빠가 좋아하는 노래, "검푸른 저 산 넘어, 이슬이 석양빛에 소리 없이 사라져...(나중에야 그것이 영화 <셰인>의 주제가 임을 알았다)" 라든가 43살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너무나 아깝게도 세상을 떠난 당시 영어 선생이던 큰언니가 벚꽃 만발한 무심천 둑을 내 손을 잡고 거닐면서 불러주던 무언지 모를 영어노래들, 그리고 그 중에 내가 열심히 따라하던 ”새드 무비(Sad Movies)" 같은 노래가 동요말고 내가 아는 전부였다. 언니가 친절히 그 노래의 내용을 다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가가 영어와 섞어 불러서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히트시킨 노래였다. 당시는 전등불을 시에서 일방적으로 켜주고 끄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밤마다 불이 나가는 시간이 통금처럼 정해져 있었다. 저녁 식사시간에 들어와서 11시인가 12시가 되면 불이 나갔다. 그래서 늘 어머니나 언니들은 불 나가기 전에 숙제하라고 종용을 하시곤 했었다. 불이 나가면 특히 밤이 긴 겨울이면 언니들과 촛불을 켜놓고 그림자 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한 이불 속에 동그랗게 둘러서 누우면 둘째 언니는 어김없이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다 큰 초등학생 동생들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었을 리는 없고 아마 말로 표현 못한 가슴속의 무엇인가를 어둠 속에서 노래로 대신했었던 것 같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겨울은 가고 따스한 해가 웃으며 떠오고...” 한 시간정도 언니의 노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유난히 숨이 짧은 둘째 언니가 숨을 참아가며 어찌나 정성스럽게 부르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어쩌면 하나같이 어두운 밤 혼자 문밖에서 울다 가버리는 겨울 바람처럼 쓸쓸하게 들리던지 나는 숨소리도 못 내고 옆에 누워 듣다가는 잠이 들고 했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말못할 하소연이었다. 그 언니가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멀리 나는 가야지,....말없이 나는 가야지” 하고 부를 때면 정말 내일 아침이면 어디로 가버리려고 몰래 보따리라도 싸 놓은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어서 졸린 데도 자지말고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과 사명감에 끙끙대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그 언니는 결국 폐가 너무 나빠서 채 피지도 못한 20대 초반에 자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 “산장의 여인”처럼 요양소로 떠나야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언니는 그 곳에서도 의사 몰래(결핵 환자는 크게 웃지도 못하게 했었다.) 밤이면 [노래]를 불렀을 것 같다.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또다시 같은 노래 가락들 속에 실어서 “말없이 나는 가야지” 하고 불렀을 건 만 같다. 언니의 노래는 지금 내가 무언가를 적는 습관과 어쩌면 같은 것이었을 테니까. 당시에는 우리의 우상인 청춘 배우도 없었다. 우리 또래의 배우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영화에 아역으로 나온 전영선이 유일한 우상정도였을까? 그러니 자연 우리의 즐거움은 책을 읽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만화 다음으로 가장 즐겨 읽던 책은 학생 잡지인 [학원]이었다. 오죽하면 전영선이 조금 커서 인터뷰를 한 내용이 [학원]에 실렸을 때 그녀가 죤 스타인 백의 [붉은 망아지]를 읽고 눈물이 났다는 말에 초등학생이던 내가 단숨에 생전 알지도 못하는 미국작가 죤 스타인백의 팬이 되어버렸을까. 잡지 내용도 당연히 요즘 같은 연예인뉴스, 패션 등은 없고 문예물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우상은 조흔파 선생님의 “얄개”였다. 얄개는 당시 우리들에게는 ‘서태지와 아이들’만큼의 문화 충격적인 이단이고 귀여운 반항아였다. 아무튼 [얄개전]은 외우도록 읽었던 기억이 나는 몇 가지 책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주부생활]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다고 알고 있는 예전의 ‘학원사‘라는 출판사는 의자에 앉아서 책보는 사람의 옆모습을 검은 실루엣으로 잡은 로고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6년 간 입고 다니던, 그리고 언니 오빠들이 줄줄이 입고 다니던 우리학교의 배지 보다 더 친근했었다. 어찌 보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게 단순한 일차원적인 검은색 작은 로고였지만 내게는 로댕 이상의 “생각”을 품고있으며, 그 이상의 “생각”을 나누어주던 중요한 잡지였다. 지금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마크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도 서울대를 다니던 큰오빠가 주말이면 사 가지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큰언니가 주는 용돈으로 책방에서 새로 나온 [학원]을 사 가지고 올 때의 그 로고가 주는 친근함과 설렘은 기억에 생생하다. 책을 손에 넣은 날은 어김없이 넷째 언니(난 언니가 자그마치 네 명이나 되었었다)와 누가 먼저 볼까 실랑이를 벌이곤 했었다. 물론 늘 언니가 이기긴 했지만. 한번은 기어이 내가 먼저 차지하고 읽겠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언니라는 서열에 눌려 빼앗기게 되었다. 나는 분을 못 참아 기어이 책을 집어 던졌다가 책이 찢어지는 바람에 큰언니인가, 큰오빠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도 TV나 인터넷에 정신을 빼앗겨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거나, 더구나 책 한 권을 놓고 서로 먼저 보겠다고 싸울 필요조차, 싸울 상대조차 없는 요즈음 우리 자녀들의 세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거리로 떠올라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 우상 같던 잡지인 [학원]에 글을 몇 번 실었어도 그게 자랑거리인 적은 없었다. 집안 식구들한테 칭찬을 받은 기억도 없다. 요즘에는 그저 자녀의 어린 시절 하나라도 위대하고 아름답고 특별한 것으로 기억해 놓으려고 창조적으로 애들을 쓰는 것 같다. 우리 딸이 초등학생일때 아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도 원생들이 서툰 연주나마 CD로 만들어 “작품”으로 남기거나, 하다 못해 아이를 “연주가”로 남겨준다고 했었다. 모든 엄마들이 특별히 사정해서 마련한 이벤트인데 그걸 신기해하는 나를 우리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은 오히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우리 딸은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손에 힘이 너무 없었다. 그러나 절대음감을 타고 태어난 우리 아니는 그 학원 학생들 중 누구보다도 음감이 뛰어나고 한 번 들은 음악은 그게 연극 배경음악이든 영화에서 나온 음악이든 아주 어려서부터도 틀림없이 기억해내곤 했었다. 초등학교 때인가 그 전인가 혼자서 “은발”이라는 미국민요를 치다가 가사가 슬프다고 가사에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 불쌍하다고 울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입학 첫 날 반에서 한사람 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자 대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생상의 백조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안나 파블로바에 대한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서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제가 없어서 여러분과 친구하고 싶습니다...”라고 해서 그때부터 길고 긴 왕따의 역사가 시작되는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한 아이였다. 엄마와 같이 본 그 영화는 파블로바의 일생을 그린 것이었다. 시위대 속에서 총에 맞고 쓰러지는 애인을 백조로 형상화하여 발레를 하던 파블로바의 우아하고 아름답고 슬픈 모습을 생상의 선율과 함께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 가슴에 빨간 핏자국을 선명하게 남기고 쓰러져가던 하이얀 백조를 아이는 숨을 죽이고 감동과 충격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동화책에서 읽은 백조는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답게 운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공대를 다니지만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과 맞는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고 하니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아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난 그런 아이를 위해서도 CD를 굽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함과 자신의 연주를 CD로 남기는 일은 다른 것이기에. 물론 나는 지금도 자주 나만 우리아이를 이 열성적인 세대 속에서 너무 느리게 키워 그만 외톨이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여러 번 자책도 하고 반성도 해본다. 그리고 그게 어린 시절 내가 받은 영향 때문이었나 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내 초등학교 시절엔 요즘처럼 그저 무슨 상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형편과는 달랐다. 부모님들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줄줄이 사탕처럼 5번째 딸인 나, 그리고 7번째 막내로 태어난 나는 그냥 지우시려다가 하필 어지러워 쓰러지신 바람에 병원을 못 가 포기하고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지 않아도 일곱 남매를 키우시다 막내쯤 내려오면 금메달을 달고 와도, (아니 반대로 아마 낙제를 해도 그러셨을 지는 모르지만) 그저 그런가보다 하시기 마련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나도 그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인지 남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외국에서의 학위나 또는 박사학위를 받는 졸업식에도 가질 않았다. 그래서 내놓을 사진하나 없는 형편이다. 그게 뭐 자랑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하다 못해 대학 전체 수석으로 소위 “영광스런” 졸업을 할 때에도 지각대장인 작은 오빠의 변함 없는 지각 때문에 3번이나 단상에 올라 상을 받았어도 사진하나 남겨놓질 못했다. 잡지사(우연인지 내가 좋아하던 학원사가 [여원]이라는 잡지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잡지에서 우리 집에 방문해서 사진도 찍고 취재해 간 내용이었다.)에서 인터뷰를 해서 커다랗게 실렸을 때에도,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에도, 아니 결혼 후 아침 신문을 보고 직장에서 점심시간 달려가 참석했던 문예진흥원 주체 주부백일장에서 산문부 장원을 했을 때에도, 무슨 주간지엔가 커다랗게 사진과 글이 실렸을 때에도, 동아일보 청탁으로 칼럼에 3회연속 글을 실었을 때도 나는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없다. 그러니 무슨 기록이 남아있겠는가. 그렇다고 그 점이 뭐 그리 아쉬운 적은 한번도 없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추억거리를 남겨두어야... 하던 친구가 있었지만 내 자녀, 내 손자, 손녀들이 꼭 금줄 달린 학사모나 옆줄 세 개 쳐진 소매의 검은 가운을 입은 내 사진을 봐야 이 어미와 할미를 박사로 인정해주는 그런 존경을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온 후에도 [학원]에는 글이 두어 번 더 실린 적이 있었지만 가족들 조차 그 일을 모른다.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은 무슨 상을 타거나 성취감,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그냥 맘속의 생각을 어디엔가 털어놓고 싶어서 했던 일 같다. 몰론 이제와 생각하면 잡지에 실리고 상을 타고 하던 일로 가족이 나를 특별히 자랑스러워하거나 칭찬해줄 사람이 없었던건 아닐까 가끔 쓸쓸한 마음이 들때도 있다. 매 달 나오는 [학원]을 먼저 보려고 언니와 다투며 안달을 했던 기억만큼도, [붉은 망아지]와 죤 스타인 백이라는 소설가의 이름만큼도, 얄개가 기도해주는 교장선생님의 손 밑에 자신의 머리대신 밀어 넣고 나온 동그란 걸상의 이미지만큼도, 내 머릿속엔 나의 그런 글쓰기의 "성과"가 중요하게 남아있지 않다. 내가 글을 실었다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린 것은 몇 년 전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만난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나보다 3-4살은 더 먹은 언니뻘의 같은 반 친구) J에게서 듣고 나서이다. 서울로 전학을 가서도 자신에 대한 글을 써서 잡지에 실었다는 사실에 대한 어린 시절의 흥분과 감격을 잊지 못하고 이젠 “아줌마”가 된 나에게 “아줌마”가 된 그가 아직도 흥분하면서 “넌 항상 약한 사람 편이었어”하고 추켜세우지 않았다면 아마 기억 저편에서 그냥 잊혀졌을 지도 모르는 일들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볼 때 난 어려서부터 그저 아무 목적 없이 늘 공책에 무언가 썼었던 것 같다. 무척 활달한 겉모습과 달리 유난히 속맘을 잘 털어놓지 못하는 나에게 그 밖에는 대화의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교 때는 그것이 더 심해졌다. 하루를 여는 첫 시간에도, 매 시간 수업시작 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때, 또는 수업이 맘에 와 닿지 않아서 다른 생각들로 머리가 기차역 대합실 모양 번잡스러울 때면 무언가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맘속으로는 경부선, 중앙선, 경춘선... 탈출의 반란과 음모를 꾸미고 있어도 선생님들은 내가 열심히 강의 내용을 적는 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늘 호의적인 시선으로 날 보셨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졸업 후 직장을 다닐 때에도 아침에 내 자리에 도착하면 우선 공책을 펼쳤다. 글을 써서 무엇을 표현하겠다는 것보다는 하루를 열기 전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종의 리츄얼 같은 것이었다. 의식이 반복되면 제의가 되는 것일까? 습관이상의 무엇, 마치 기도와 같은 일과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실 일기 쓰기를 한 3년 멈추었던 적도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작은 오빠의 말을 듣고 부터 였다. 내가 무척 힘들어서 끙끙대고 있을 때, 청승맞다고 엄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숨을 곳 없어서 방 한구석에서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흘리며 힘들어 할 때 작은 오빠가 말했었다.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너 자꾸 일기 쓰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인 게 아닌데 항상 글로 규정짓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니까 자꾸 혼돈이 오고 힘든 거야....” 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만큼 오빠의 논리에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날로 일기 쓰기를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논리적인 거 말고, 해석하며 사는 거 말고 그냥 모순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싶었다. 해석이 안되면 괴로우니까. 너무 고독하니까. 쓰다보면 자꾸 왜냐고 묻게 되니까. 삶에게 “왜?”라는 물음표를 달고 싶지 않았다. “왜” 삶은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찼는지. 고통의 연속인 이 삶을, 자신의 의사와 무관히 존재하게 된 이 삶을 사람들은 “왜” 끝까지 살아 내어야 하는지.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 “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순간 슬픔의 그림자가 함께 느껴지는지. “왜” 인간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지. “왜” 세상의 모든 기쁨은 이렇게 순간적인 것인지. 반짝이는 별 같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 이런 것들이 반짝이며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해 준다해도 역시 인생은 어두운 밤하늘일 뿐인걸.... 글이라는 논리 속에, 언어의 틀 속에 세상이치를 자리 매김 하지 말라는 오빠의 한마디 충고가 내게 세상을 보는(받아들이는) 또 다른 길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무척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 후로 정말 오랜 동안 글 쓰기를 포기했었으니 말이다. (물론 학교 신문사에서 쓰던 칼럼은 다른 의미의 글이었다.) 그리고 쓰는 것은 습관인지라 다시 돌이키려면 나의 언어를 다시 찾아내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쓰는 것을 포기함으로 생각마저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니 그 무엇보다도 글 쓰기는 해석이전에, 논리적인 풀이 이전에 나의 호흡이었고 숨쉬는 통로였으며 내 속의 무엇을 불러오기도 하고 달래기도하고 풀기도하고 쫓아내기도 하는 일종의 성소였는데 그만 내가 너무 성급히 도망갔던 것 같다. 글 쓰기라는 피난처에서 더욱 황량한 광야로. 그런데 언제부턴가 다시 일기는 아니어도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수첩마다 빼곡이 메모를 했다. 스케줄이 아니라 그 날 있었던 일을 메모했다. 수첩엔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시 구절, 떠오르는 생각... 무어든지 적었다. 그런데 그 일기들이며 수첩이 잘 보관 된 것도 아니다. 난 수없이 그 기록들을 잃어―그래서 결국은 잊어―버렸다. 어떤 수첩은 수업 중에 시를 읽어주느라고 교탁에 올려놓고는 잊고 그냥 두고 왔었던 거 같다. 제발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글을 교실에 붙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아마 그 속에 비상금으로 넣고 다니던 수표 한 장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귀한 내 삶의 기록을 누군가는 그 속에 든 “현실적 가치” 한 장 때문에 쓰레기통에 넣어버렸을 것이다. 마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인디안의 이름을 새로 가지게 된 백인 던바가 아끼던 일기처럼 그렇게 버려졌던 것이다. 그 영화에서 던바는 인디안의 친구가 된 자신을 추적하는 백인 병사들을 피해 도망을 가다 말고 그의 일기를 찾으러 돌아왔다가 결국 백인들의 손에 붙잡히게 된다. 그러나 던바가 목숨까지 걸며 찾고자 했던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존”의 기록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그린 일기의 페이지는 백인 군인들에 의해 찢기어 토일렛 페이퍼 대용으로 사용된다. 화면에 비쳐지던 황야에 사방으로 찢겨 흩어지는 던바의 일기가, 조롱당하는 던바의 추억과 가치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렇게 내가 도둑맞은 나의 과거의 삶의 흔적, 내가 분실하고 실종시킨 역사는 한 두개가 아니다. 유학을 다녀오는 사이 내 물건들을 맡겨둔 언니 네도 해외로 나가게되자 일기며 공책들은 슬그머니 폐기처분되었던 것 같다. 돌아와 보니 내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애써 여기 저기로 나뉘어 보관된 가구 몇 점과 그릇들이 전부였다. 신세를 지는 처지에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스스로 나의 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겪는 당연한 결과이니 누굴 탓할 것도 못되었다. 보물처럼 상자에 넣어 보관을 부탁한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보관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더 귀해 보였던, 그래서 식구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지켜주다가 내게 돌려준 그 가구들은 마치 무언가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순된 인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실소를 머금고 생각해본다. 그게 아마 공책에 써넣은 일기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가 공책을 대신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과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PC 앞에서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한 후에도 안타깝게 3년에 걸친 내 과거는 또 한번 “삭제”되어버렸다. 학교 전산실 직원이 내 컴퓨터를 손봐주면서 모든 자료를, 그리고 내 어줍잖은 글들과 모아놓은 소중한 이메일들을 실수로, 정말 실수로, 복구 불가능하게 완전히 날려버렸다. 일기나 이메일, 수필 등은 논문이 아니었으므로 굳이 따로 디스크에 받아놓지 않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다였고 난 그 해 겨울 내내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이름 모를 무기력증에 아무것도 못하고 시름시름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기 쓰기를 그만둔 지 또 한 3년 가까이 되었다. 눈뜨고 부터 감는 순간까지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한자 적을 기력조차 상실했다. 그리고 그 사이 일어난 일들은 한 줄로 적기엔 너무 복잡해서 엄두를 내지 조차 않았다. 옛날 오빠의 충고대로 내가 그 이해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글이란 걸로 규정짓고 그러다 보면 더 시험에 빠져서 내 맘이 요동치며 파도타기를 할까봐 “생각 없이, 아무것도 왜 라고 묻지 말고 그냥 행동만 하기로” 다시 결심하고 산지 3년이 넘었다. 기력이 없었다. 치열하게 물을 기력도, 아침마다 조용한 ‘제의’를 치를 짬도, 의욕도 없었다. 걷기도 모자라 뛰어다녔다. 적고 생각하는 대신 생각하지 않으려고 뛰었다. 수첩은 깨끗하다. 이전 옛날의 습관 대신 나이 탓에 생간 건망증을 돕느라고 간단한 메모-- 10시 XX회의, 5시까지 XX서류 제출, 등만 적혀있다. 피곤하면 잠시 나를 찾고, 나를 만나던 그 수첩, 일기가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난 조금씩 또 무얼 적고 있는 날 발견했다. 자꾸 잃어버리니까 애착은 없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남기려는 의도 없이도 그냥 쓰는 습관만이 슬그머니 다시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래, 그것도 또 5년만이다. 내 삶의 터가 바뀐 이후로 내 삶의 형태도 바뀌었으니까) 콘서트를 갈 일이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어떤 교수님이 나에게 재즈콘서트를 같이 가자고 제의해 온 것이었다. 나에 대한 비밀을 하나 이야기한다면 그건 내가 아주,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날마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어다니며 바삐 사는 나, 교실에 서면 목소리도 남보다 한 톤이 더 높은 나, 건강 그 자체 같아 보이는 통통한 볼 살과 혈색을 가진 내가 무기력하다면 모두 다 사시를 뜨고 “꾸며댄다고” 눈을 흘기니까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있다. 그러나 난 약속을 미리 하지 못한다. 지키지 못할까봐 겁이 나서. 주말에 죽은 듯이 몰아서 한꺼번에 아프고 나야 하는데 약속을 하면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말리지도 못하고 그 몸으로 다시 새로운 한 주일의 일상의 물 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내 몸은 천근만근 더 이상 가눌 수 없으니까. 다음 주에 아무리 햇빛이 강해도 그 몸을 다 말릴 수은 없으니까. 게다가 주말이라고 햇빛만 비치는가? 맘과 몸이 고달픈 흐린 날, 비까지 오는 날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난 내 삶을 최대한 단순화한다. 그러다 보니 직장일 말고는 불쌍하게도 내 삶은 없다시피 된지 꽤 오래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살기를” 희생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날도 재즈콘서트를 약속해 놓고는 아침에 일어나려고 용을 쓸 때부터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마 “정명훈과 함께 하는”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아직도 결혼을 (독신주의가 아닌데도) 못한 40살 넘은 그 여교수의 청함이 아니었다면, 아니 그보다 그 여교수가 날 본 첫날, 자신이 15년 넘게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사연을 구구절절이 상담해오지만 않았어도 약속을 취소했거나 거절했을지 모른다. 일 때문에 처음 만난 내게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내가 낯선 사람이므로 오히려 “안전”하다고 여겨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나도 이젠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나 보다 라고 감격하거나, 의지할 수 있다고 봐 주었나 보다 따위의 환상을 가지지는 않는 나이가 되었다) 이해하지만 그래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엊그제 처음 만난 나에게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할 수밖에 없는 그 교수의 외로움(?)―이것도 내가 쓰는 소설일까?―에 생각이 미치자 난 거절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난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퇴근시간의 한강다리”를 건너 세종문화회관으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그녀는 가슴에 현기증 나도록 노란 인형을 안고 있었다. 치킨세트를 시켰더니 경품으로 주었다고 소녀처럼 기뻐하면서, 같이 데리고 온 사무실 직원 몇 명과 함께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난 그들의 낯선 대화, 낯선 즐거움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청했다는 것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난 느꼈다. 안전해서도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녀가 무언가 말하고 싶을 때 마치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처럼 내가 우연히 거기 있었던 거고, 또 콘서트를 가고 싶은데 우연히 상대로 내가 떠오른 거라고. 내가 아니어도 좋을 자리에 무슨 “친구”연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지고 젖은 솜덩이를 이끌고 먼, 먼 다리를 건너온 내가 바보, 또 바보 같았다. ‘그래 넌 항상 그렇지 뭐. 혼자 상상하고 혼자 꿈 깨고.’ 또 다시 찝찔한 맛을 삼키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찝찔함에는 언젠가 우리 딸이 해준 말, “엄마, 남에게 기꺼이 이용당해주면 안 돼? 그게 사랑이잖아!” 했던 말이 섞여있었다. 그 여교수가 외롭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그 외로움의 곁에 꼭 내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녀가 필요한 게 아니었는데. 재즈도 아니었는데. 물기를 말려줄 햇빛이 나의 절실한 구세주일 뿐인데. 조금만 건드려도 주르르룩 물이 흐를 지경인데. 표정관리가 어려운 날 보며 그 교수는 “얼굴이 부어 보이네요. 어디 아파요?” 한다. “살이 찐 거예요.” “아유ㅡ 며칠사이에 무슨 살...” 난 속으로 “물에 젖은 솜이라 그래요”라고 말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닭튀김의 기름 냄새를 맡으며, 셋이서 떠는 수다를 볼 근육이 뻣뻣하도록 미소를 짓고 바라보면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 후 음악회장에 입장했다. 이층 객석에 자리잡자 불이 꺼지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보니 어느새 내가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는 객석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것이었다. 사방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았다. 재즈에 웬 아이들일까? 내가 생각하는 재즈감상은 이런 대강당이 아니라 클럽이어야 할 것 같았다. 무대와 객석이 조명으로 차단되고 시작을 알리는 은근하고 위엄 있는 종과 인터미션의 종이 울리고 몇 번씩의 무슨 관례처럼 되어버린 기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나면 조용히 의자 소리도 내지 않고 앉아 몰입해야만 경지에 오른 청중이 되는 그런 것말고. 루이 암스트롱이 공연 중 가사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두비두비 두왓 다 두두…… 하고 즉흥적으로 읊조린 것이 창법이 된 그 스캣처럼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친해도 좋고 혼자여도 좋고 그런 작은 홀이어야 할 것 같다. 홀이었다면 어울렸을 행동을 옆 교수가 하고 있었다. 리듬을 타는 듯이 몸과 고개를 가끔 흔들어 댔다. 그럴 때마다 의자가 삐걱 삐걱 어울리지 않는 화음을 곁들였다. 그런데 왜 그 흥이 그렇게 흥이 나지 않는 것일까? 슬쩍 슬쩍 그녀를 훔쳐보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수첩을 꺼냈던 것 같다. 그리곤 어둠 속에서 열심히 적다가 한달 전 제주도 여행할 때 어떤 동료교수님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적었다가 글 쓰시려고 그러시죠?” 그 말이 귀에 다시 떠오르자 난 슬그머니 수첩을 집어넣었다. 이런 경우 아니라도 난 직업병 때문에 늘 무언가를 적는다. TV 곁에도, 하다못해 부엌에도 항상 작은 메모패드나 공책이 하나있다. 그러나 아까 같은 질문, "그렇게 써 두었다가 나중에..."라는 질문에 답답하고 막막해 지는 것은 사실 나는 그런 지식과 정보용 메모까지도 적고 그걸로 끝이라는 것이다. 다시 들여다보는 법도 없다. 하기야 중고생 시절에도 단어장을 만들어 단어를 따로 왼 기억도 그리 많지 않다. 언젠가는 시간 나면 PC에 말끔히 정리해 두어야지 결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책상 서랍이나 이런 저런 곳에 온통 쪽지 투성이다. 결국은 정리도 못한 채 어느 날인가 지쳐서 포기하고는 오래된 영수증 버리듯 버리곤 한다. 이사갈 적마다 대청소를 할 적마다 늘 고민 끝에 버리는 것은 신문 중에서 모아둔 글이나 사진, 또는 내가 메모해둔 이런 저런 것들이다. 그렇게 아무데도 써먹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난 집에 있을 때면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할 때에도 TV문학관에서, 미술기행에서, 철학강의에서 AKN에서 무슨 재미있는 말이 나오면, 또는 영어 표현이 나오면 젖은 손을 급히 닦고 뛰어와서 적는 버릇이 있다. 아마 내 옆방의 Y교수라면 그 적은 것으로 책 몇 권은 족히 출판했을 것이다. 난 그 교수처럼 모든 게 정리되어있는 법이 없다. 책을 읽다가도 그 책에서 무슨 재미있는 용어나 주제가 나오면 그것과 관계된 책을 찾아서 또 읽어본다. 그러다 보니 책상 위는 항상 여러 주제의 서류와 책들이 얽혀있다. 언제 들어가 봐도 깨끗이 정리된 사람들의 책상을 보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다. 난 왜 이렇게 정리를 못하지? 누가 내 방을 방문하면 난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아유, 책상정리를 아직 못해서... 오늘은 좀 정신 없이 바빠서 책상이 엉망이죠? 하고. 책상과 서류를 말끔히 정리하고 사는 사람들은 생각도 나와 달리 깔끔히 정리되어있을 것 같다. 인간관계도, 과거와의 관계도 미래와의 계획도......
애써 변명하자면 난 그저 목적 없이 늘 적는 이런 내 버릇을 적극적인 수용이라고 부른다. 소극적으로 들리니까 듣는 것말고, 보이니까 보는 것말고, 스쳐지나가니까 느끼는 것 말고, 바람처럼 불어오니까 머리카락 한번 흩날리고는 보내버리는 것말고, 들은 것에 끄덕여주고, 보이는 것을 카메라에 담듯 머릿속 영상 막에 찍어두고, 스쳐 지나가는 것 옷깃 한번 붙잡아 눈맞추고 확인한 후 보내주고, 바람에 스친 향기 오래 기억하려고 그 냄새에 이름 지어주는 그런 적극적인 삶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면서도 한 번 찾았던 동굴에 이름 새기고 돌아서는 것 같은 행위일까? 그것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라도 내가 이곳에 왔었다고 기억되고 싶어서 새겨놓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동굴에게 표하는 적극적인 교제행위일까? 재능 있는 분들은 그런 것들을 다 글로 쓸 것이다. 기행문을 쓰기도 하고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라고 시로 쓰기도 하겠지. 난 그런 능력이 없으니 그저 메모만 할 뿐이다. ‘코스모스가 벌써 피었다.’ 라든가. 좀 더 일 이분 시간과 마음이 여유 있는 날이면 ‘오늘 아침 출근길, 고속도로변에서 첫 코스모스를 보았다. 순간순간 그저 쏜살같이 스쳐 달려갈 뿐인 수많은 고속 차량들에게 혼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의무인양 온몸으로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가 고작이다. 그리곤 아주 가끔 내가 살고 있나 죽어 있나 확인해야 될 것 같을 때 수첩을 보곤 한다―아니 했었다. 아, 이날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구나. 의식이란 게 깨어있었구나 하고. 적극적으로 삶에 개입했었구나 하고. 수업 중에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내가 가장 당혹하고 혹은 격리감을 느끼는 것은 강의를 듣기만 하면 다 기억하는 천재인양 필기를 하는 학생들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용어나 생각들을 내가 가끔 보드에 써주어도 그냥 눈으로 외워버린다는 것이다. (내 강의는 교재가 없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다.) 그런데 왜 난 아직도 자꾸 적어야 하지? 그 학생들은 천재인가 보다. 난 너무나 머리가 나빠서 적는 행위라도 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나보다.
그 날 음악회에서 무어라고 썼었던가? 재즈를 잘 모르는 내게 그 날 음악은 몇 개의 곡 외엔 지루했다. 그래서 적기 시작했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음악보다 베이스 연주자였다. 소설가 쥐스킨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그 연주자는 자기 만한 악기를 품에 안고 연주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섬세하게 그 악기를 어루만지면서 연주를 하는지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여인도 그보다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어루만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렇게 낮으면서도 간절한, 가장 설득력 있는 소리가 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에게나 들릴 그 낮은 목소리 말이다. 나는 때로 음악회에 가면 연주자와 악기와의 그 놀라운 교류를 바라보며 환희를 느낀다. 모든 것에서 완전히 격리된 그들만의 일치, 그리고 그 일치가 만들어 내는 음. 그들이 얼마나 서로 일치가 되어있는가가 음의 질을 좌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건 오디오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시모 같은 소리를 낼 때 연주가들의 땀이, 정말 진한 땀이 솟는 절제된 연주는 아름다움의 극치 같다. 절제야말로 힘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주자와 음악 아니 악기가 일체가 된 음악을 들을때면 가슴이 무너지곤 한다. 물론 음악을 듣다가 흥분되어 모든 피로를 다 잊었던 적도 있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던 때였다. 그 날도 너무 지쳐서 언제나처럼 커피를 진하게 보온병 가득 타서 비상약처럼 곁에 두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FM을 틀었는데 마침 미샤 마이스키 공연 실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음악회에 가보지 못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음악학과 교수는 내가 CD나 테이프, FM에서 클래식을 듣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그런 것으로는 고전음악을 도저히 못 듣는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지만 작은 음악홀인 차 안에서 내겐 그것도 때론 “좋아서 죽을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날은 반 수면상태에서 운전하면서 아무 기대도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는 차츰 나를 피로의 늪에서 끌어내어 넓은 광야로 달리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A 장조 3번 소나타는 압권이었다. 마이스키의 저음은 놀랍고도 화려한 노크였다. 나도 돌봐주지 못한, 내 관심이 미치지도 못하는 내 깊은 가슴속 바닥까지 찾아가 노크를 해주는 기분이었다. 그 깊은 속에서 문을 열고 맅케의 “소년”이 달려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밤중에 야생마를 타고 달리는 소년, 나는 그런 소년이 되고 싶다”는 릴케의 시를 외우며 단숨에 말을 달리듯, 몸이 날아갈 듯 고속도로를 달려왔었다. 마이스키를 들어보긴 처음이었다. 한복을 입은 멋진 모습의 그가 신문에 화재가 되고 내한공연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모든 것 다 잊고 귀 막고 눈감고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그의 음반을 사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오래 묵은 좋아하는 음악을 꺼내 듣고 또 듣는 기쁨과 달리 이렇게 뜻밖의 “연인”을 만나는 기쁨은 잊을 수가 없는 감동이다. 지금 마이스키를 듣는다면 아마 그 첫 대면의 흥분을 느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들어도, 들어도 첫 설레임과 가슴 벅찼던 감동이 줄어드는 법이 없다. 나는 그의 쇼팽 피아노 콘체르트를 “끈적끈적”하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일반적으로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부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왠지 깔끔하지 못하고 껌처럼 달라붙는 느낌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끈적끈적하다는 말은 연주자의 손과 건반, 연주자와 음악이 단 한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완벽히 밀착되어있다는 의미이다. 그가 연주하는 쇼팽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전 악장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하나의 음과 같다.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이 영혼을 빨아들이는 음의 흡입력, 그걸 이 언어가 부족한 나는 끈적끈적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니! 비가 오면 빗물로, 낙엽이 지면 낙엽 지는 가을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겨울로, 꽃잎 흩날리고 아카시아 향기 퍼지는 봄이면 봄이 되어 언제든지 영혼의 시로 흐르는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바로 쇼팽과 연주자와 청중을 하나로 일치시켜 “나”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흡입력의 비밀은 다름 아닌 그가 연주해내는 깊은 슬픔이다. 감상적인 슬픔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강에서 길어낸 순수하게 투명한 슬픔 말이다. 가장 약하면서 가장 강한 그 슬픔 말이다. 슬프도록 순수한 자유 말이다. 이와 비슷한 슬픔을 나는 우습게도 모차르트 속에서도 발견한다. 내 말이 전문가들에게는 우습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무엇일까. 모차르트 피아노 콘체르트 23번 2악장이나 하다 못해 21번 2악장의 밝음 속에 감추어진 그 미묘한 슬픔, 잘 짜여진 틀 속에 모순처럼 자유로이 흐르는 슬픔의 강은? 그 미묘한 밝음과 어둠, 희망과 절망의 공존은? 이렇게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되어 악보 속의 음악을 살아 숨쉬는 시간 속에 존재시키듯이 나의 쓰고자 하는 욕구도 나와 삶이 단절되었을 때 다리를 놓기 위한 것,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인 것 같다.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필사적인 증명인 것이다. 내가 끈끈하게 내 삶에 밀착되어 결코 겅정겅정 지나쳐 버리거나 내 삶을 외면해버리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증명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난번 음악회에서 내가 그만 울어버렸나 보다. 벌써 7, 8년도 넘은 일이다. 장영주, 장한나, 요요마, 이작 펄만 등이 출연하는 <갈라 콘서트> 때였다. 누군가가 내게 표를 선물하겠다면서 관람을 원하는 날짜를 물었고 난 그 티켓을 받고는 당연히 내가 원하는 그 날짜인 줄 알고 딸아이와 함께 갔었다. 그런데 이층 우리 좌석에 다른 이들이 앉아있는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내 표는 그 전날 공연입장권이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입구에서도 나 같은 바보를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냥 보내준 것 같았다. 구세주처럼 종이 울리고 불이 꺼졌다.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쩔쩔매는 딸아이를 달래서 좌석 옆 계단,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앞부분에 앉았다. 그런데 맨 뒤 좌석에 앉아있던 (내 처지를 모르는) 다른 이들이 내 용기(?)에 힘을 얻고는 따라서 계단으로 나와 앞으로 내려앉는 것이었다. 비참하던 층계 신세가 그분들의 순수한 음악에의 열정 덕에 체면쯤은 중요시하지 않는 무슨 용기 있는 음악사랑으로 무마된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따라 나와서 계단에 같이 앉아 준 이들이 너무 고맙다.) 연주는 예상처럼 정말 좋았다. 옆에서 너무나도 행복해하는 아이의 얼굴에 더더욱 행복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난 어둠 속에서 줄줄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그게 티켓 날짜도 모르고 입장한, 늘 그렇듯 바보 같이 어리비리한(사실은 항상 기력이 소진되어 그런 것이었지만) 나 자신의 초라함 때문인 줄 알았다. 다른 이들이 같이 내려와 앉아주지 않았으면 어셔에게 쫓겨날 수도 있었을 위기를 넘긴 아주 짧은 순간의 비참함과 당혹함, 아이를 실망시킨 미안함, 그리고 그 후의 안도감이 가져다준 뜨끈뜨끈한 피로감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난 그들의 음악이 들려주는 어울림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작은 별, 큰 별, 밝은 별, 흐린 별, 수많은 별들이 모두 모여 도도히 흐르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강, 갤럭시의 찬란함에 감동 받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 서로 화답하며 연주를 하는 순간 그들에겐 인종, 국가, 성별, 나이, 연주, 악기의 다름,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음악이라는 공통 화두 속에 자기를 기꺼이 방기(放棄)한 자들의 자유와 그 자유 속에 탄생되는 음악의 아름다움과 감동만 있을 뿐이었다. T. S. 엘리엇이 “황무지”를 헤매다가 결국 답을 찾은 “천둥의 소리”인 다. 다야드밤, 다미야타, 즉 주고(give), 공감하고(sympathize), 콘트롤(control)하는 어울림이 나를 감동시켜 버렸던 것이다. 아니, 이제와 좀더 솔직히 말하면 감동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부끄러운 자기 설움이었다. 나는 저런 어울림과 하모니 속에 한번도 속해보지 못했다는 데 대한 지독한 부러움이 종래는 그 최악의 상태인 자기 연민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래, 자기 연민이라고 외면당해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무언가를 늘 적는다는 것은 외로움 때문인가 보다라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셰도우랜즈>라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책을 읽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고 묻고 있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무언가를 쓰는 지도 모른다. 릴케는 눈을 뜨는 순간 쓰고 싶은 욕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면 우리는 작가라고 했지만 난 결코 그 차원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동료 교수님이 물었듯이 책을 만들어 내려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언덕을 넘어 이제는 내려가는 길에 선 이 나이가 되도록 소위 '책 한 권' 남겨진 게 없으니까. 수백개의 시를 써놓고도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가 어려서부터 꾸물꾸물 굼벵이처럼이라도 무언가를 쓰는 것은, 쓰고는 그냥 잊어버리더라도 그 순간 혼자가 아니었다고, 적어도 나 자신과 대화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때문인 것 같다. 그럼으로써 그 순간 적극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고, 어느 날 생을 마감할 때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면서 좀 떳떳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나도 그 때,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유일한 증언, 소리 없는 외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만의 무대인 일기장속에서 독백 같은 모노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것일 게다.(12. 2002)
그날 갈라 콘서트에서 연주한 곡 중 하나, Brahms- Double Concerto for Violin and Cello, A minor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투병 중 2 - BHLee
나는 갑자기 하이얀 침대에 누워 아프고 싶습니다. 맘 놓고 죄스럼 없이 아프고 싶습니다. 하이얀 침대에서 아픈 것은 당당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막, 당장, 하이얀 침대에 쓰러져 실컷 아프고 싶습니다. 하얀 병원 밖 알록달록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감쪽같이 앓는 건 참 많이 쓸쓸한 일입니다.
끝도 없는 병원 밖 긴 긴 담 길을 걷노라면 가끔 울컥 눈물이 납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경계선에서 감쪽같이 앓지 않는 건 참 많이 사무치게 쓸쓸한 일입니다.
04 MP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얼마 전 산에 같이 간 20년 넘는 사랑하는 제자가 말했다.
“신기해요. 선생님은 어떻게 죽어가는 꽃이 눈에 띄세요? 그런 사람 선생님 밖에 없을 거예요. 호호호...”
내가 초록초록으로 온 세상이 물든 속에서 숨어있는 죽어가는 꽃과 나뭇잎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화창한 봄날, 사방에 눈이 부시도록 꽃망울이 터져 나오던 날, 몇몇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물론 나는 사진을 어떻게 잘 찍는 것인지 배우지 못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온갖 아름다운 빛깔로 세상을 덮은 꽃들 틈에서 그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 화려한 생명의 탄성 속에 가만히 묻혀있던 침묵이었다. 죽은 나무, 죽은 꽃들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죽은 꽃들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그 꽃들을 열심히 찍었다. 그때 (엄청 그림 잘 그리는) 화가인 내 친구가 말했다. 참 이상하다면서. 야, 누가 그런 어두운 사진을 좋아하겠니? 왜 이 아름다운 봄에 그런 사진을 찍어? 누가 그런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싶겠어..
그 친구는 언젠가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갈의 그림을 이야기하자 (하얀색의 "비데부스크를 넘어서"라는 그림) 그때도 뜻밖이라고 말했다. "너가 어떤 그림을 고를지 무척 궁금했는데 뜻밖이네." 색채의 마술사 샤갈의 그림 중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어찌 그것 하나일까. 다만 그때는 그 그림이 가장 내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그 비스듬한 귀향과 노스탤지어에 때문에. (후에 정말 뜻밖에 세상을 떠난 그가 고통 속에서 남긴 마지막 그림도 역시 더욱 밝고 열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색감의 그림이어서 나를 더욱 감동시켰다.)
그 친구 말이 맞다. 지극 당연한 말이다.
나도 봄이 되면 꽃들 속에서 환하게 살아나는 내 몸과 마음을 생생하게 체험하니까. 맞는 말이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에서 뜨거운 열정의 계절을, 지금을, 현재를 맘껏 누리고 취해야지 왜 곧 찾아올 긴긴 가을과 겨울을 미리 기억하려 하는 것일까. 이상할 수밖에.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발견하는 그 죽은 잎이나 꽃은 여름을 잊는다던가, 현재를 누리지 못한다던가 하는 마음과는 무관한 것이다. 어둠을 기억하지 않는 빛의 감사가 있을까? 죽음을 망각한 삶의 감사와 환희가 있을까? 그리고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여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죽어서도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명 속에 소외된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 웃음 뒤에 숨겨진 아픔을 기억해주고 알아주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생명을, 꽃을, 초록을, 삶의 봄과 여름을 감사하며 누리는 나의 방식이라면 이상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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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
모란 터져버린 "찬란한 슬픔의 봄" - 5월이다.
아파트 화단에 며칠 전 모란이 함박웃음처럼 화알짝 피었었다. 어제저녁 일부러 카메라를 가져갔지만 벌써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아주 큰 꽃밭이 있었다. 뒷마당 비스듬히 경사지게 만든 꽃밭에는 키 작은 채송화부터 맨드라미, 해당화, 모란, 샐비어, 칸나, 매화, 온갖 색깔의 장미, 사철나무, 무궁화, 찔레, 수국,.. 등등, 참 많은 꽃나무들이 (그리고 대추나무도) 있었다. 나는 언니 오빠가 모두 학교 가고 혼자 남은 오후, 쨍하게 깨질 듯한 정적 속에서, 그리고 현기증 나게 환한 햇살아래서 항상 꽃밭에서 놀았던 것 같다. 바닥에 뚜욱뚜욱 떨어진 꽃잎들을 주워서 돌로 찧어 혼자서 일인 몇 역을 하면서 소꿉놀이도 하고.... 엄마를 찾아 부엌으로 가면 커다란 무쇠 솥들이 돌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주르륵 앉아있고 그 아래 불 꺼진 아궁이는 오후의 정적만큼이나 거대한 암흑의 입을 벌리고 나를 삼킬 듯 쳐다보았다. 평소 따뜻하던 부엌은 나른하고 외로운 오후의 정적 속에서는 항상 그렇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였다. 엄마는 늘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나는 참 외로웠다.
엊그제 동네에서 모란을 보았을 때,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가 잠든 공원묘원은 봄이 되면 꽃이 유달리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봄에 늘 공원묘원으로 놀러 가서 다른 사람들이 하필 묘지로 봄나들이를 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한다던 Mrs. Patch의 말이 생각난다. 난 마음과 달리 엄마의 묘소에 혼자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그립다고 말하는 게 참 염치없고 죄스럽다. (얼마 전 딸과 사위와 함께 엄마와 아버지, 오빠가 잠든 그곳을 찾아뵈었을 때 우리 마음처럼 안개비가 내렸었지... 아이는 그만 눈물을 터뜨렸지...)
어김없이 5/8일은 찾아오는데 나는 엄마를 찾아뵐 수 없다.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친정이 이제 없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치매 병원에 계실 때도, 그렇게 그곳에 홀로 남겨지는 게 싫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 우리만 가면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아기처럼 애교를 부리며 보채셨는데.... 다른 사람 다 몰라봐도 그리 사랑하셨던 우리 딸이 가면 유난히 좋아하셨던 엄마. 일부러 곡기를 스스로 끊으신 엄마.... 그때도 나는 내 고통에 함몰되어 허우적거리느라 자주 찾아뵙지도 않았다. 참 모질고 이기적인 나쁜 딸이었다. 인간은 얼마나 모질고 이기적인가. 내가 엄마 그립다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후회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인지.... 사람들은 꼭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후회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때에야 후회하는지 모른다. 용서를 해 줄 이 이미 사라진 후에야 허공에 대고 용서를 구하는 이 이기심.
---------------------------- 2023.5.1. 올해는 어느 때보다 일찍 찾아온 봄 때문에 모란도 일찍 피었다 진 거 같다. 엄마 본 듯 반갑고 고마워서 가서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잘했다고, 이쁘다고... 말 걸어주고 돌아왔다. 몇 번의 이사를 견디고 저렇게 잘 살아주다니...
그런데 어제 지난주 올케언니의 도움으로 몇 뿌리 어렵게 어렵게 파서 가져왔다고, 잘 키워서 자라면 나에게도 주겠다고 전화가 왔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새 - 마종기>
비 오는 날에는, 알겠지만 창밖으로 늘 새들이 하는 말이 들리는 집이 참 감사하다.
새의 노래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지. 자신이 언어를 찾지 못한 이야기,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카나리아 새는 노래하고 있다고. 갑자기 뚝! 기온이 떨어진 비 오는 날~ 새들의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사이에 이해하기보다 함께 느끼며 살고 싶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할 때,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길을 묻고 싶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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