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bhlee
모란 터져버린 "찬란한 슬픔의 봄" - 5월이다.
아파트 화단에 며칠 전 모란이 함박웃음처럼 화알짝 피었었다. 어제저녁 일부러 카메라를 가져갔지만 벌써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아주 큰 꽃밭이 있었다. 뒷마당 비스듬히 경사지게 만든 꽃밭에는 키 작은 채송화부터 맨드라미, 해당화, 모란, 샐비어, 칸나, 매화, 온갖 색깔의 장미, 사철나무, 무궁화, 찔레, 수국,.. 등등, 참 많은 꽃나무들이 (그리고 대추나무도) 있었다. 나는 언니 오빠가 모두 학교 가고 혼자 남은 오후, 쨍하게 깨질 듯한 정적 속에서, 그리고 현기증 나게 환한 햇살아래서 항상 꽃밭에서 놀았던 것 같다. 바닥에 뚜욱뚜욱 떨어진 꽃잎들을 주워서 돌로 찧어 혼자서 일인 몇 역을 하면서 소꿉놀이도 하고.... 엄마를 찾아 부엌으로 가면 커다란 무쇠 솥들이 돌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주르륵 앉아있고 그 아래 불 꺼진 아궁이는 오후의 정적만큼이나 거대한 암흑의 입을 벌리고 나를 삼킬 듯 쳐다보았다. 평소 따뜻하던 부엌은 나른하고 외로운 오후의 정적 속에서는 항상 그렇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였다. 엄마는 늘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나는 참 외로웠다.
엊그제 동네에서 모란을 보았을 때,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가 잠든 공원묘원은 봄이 되면 꽃이 유달리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봄에 늘 공원묘원으로 놀러 가서 다른 사람들이 하필 묘지로 봄나들이를 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한다던 Mrs. Patch의 말이 생각난다. 난 마음과 달리 엄마의 묘소에 혼자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그립다고 말하는 게 참 염치없고 죄스럽다. (얼마 전 딸과 사위와 함께 엄마와 아버지, 오빠가 잠든 그곳을 찾아뵈었을 때 우리 마음처럼 안개비가 내렸었지... 아이는 그만 눈물을 터뜨렸지...)
어김없이 5/8일은 찾아오는데 나는 엄마를 찾아뵐 수 없다.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친정이 이제 없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치매 병원에 계실 때도, 그렇게 그곳에 홀로 남겨지는 게 싫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 우리만 가면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아기처럼 애교를 부리며 보채셨는데.... 다른 사람 다 몰라봐도 그리 사랑하셨던 우리 딸이 가면 유난히 좋아하셨던 엄마. 일부러 곡기를 스스로 끊으신 엄마.... 그때도 나는 내 고통에 함몰되어 허우적거리느라 자주 찾아뵙지도 않았다. 참 모질고 이기적인 나쁜 딸이었다. 인간은 얼마나 모질고 이기적인가. 내가 엄마 그립다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후회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인지.... 사람들은 꼭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후회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때에야 후회하는지 모른다. 용서를 해 줄 이 이미 사라진 후에야 허공에 대고 용서를 구하는 이 이기심.
---------------------------- 2023.5.1. 올해는 어느 때보다 일찍 찾아온 봄 때문에 모란도 일찍 피었다 진 거 같다. 엄마 본 듯 반갑고 고마워서 가서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잘했다고, 이쁘다고... 말 걸어주고 돌아왔다. 몇 번의 이사를 견디고 저렇게 잘 살아주다니...
그런데 어제 지난주 올케언니의 도움으로 몇 뿌리 어렵게 어렵게 파서 가져왔다고, 잘 키워서 자라면 나에게도 주겠다고 전화가 왔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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