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산에 같이 간 20년 넘는 사랑하는 제자가 말했다.
“신기해요. 선생님은 어떻게 죽어가는 꽃이 눈에 띄세요? 그런 사람 선생님 밖에 없을 거예요. 호호호...”
내가 초록초록으로 온 세상이 물든 속에서 숨어있는 죽어가는 꽃과 나뭇잎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화창한 봄날, 사방에 눈이 부시도록 꽃망울이 터져 나오던 날, 몇몇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물론 나는 사진을 어떻게 잘 찍는 것인지 배우지 못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온갖 아름다운 빛깔로 세상을 덮은 꽃들 틈에서 그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 화려한 생명의 탄성 속에 가만히 묻혀있던 침묵이었다. 죽은 나무, 죽은 꽃들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죽은 꽃들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그 꽃들을 열심히 찍었다. 그때 (엄청 그림 잘 그리는) 화가인 내 친구가 말했다. 참 이상하다면서. 야, 누가 그런 어두운 사진을 좋아하겠니? 왜 이 아름다운 봄에 그런 사진을 찍어? 누가 그런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싶겠어..
그 친구는 언젠가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갈의 그림을 이야기하자 (하얀색의 "비데부스크를 넘어서"라는 그림) 그때도 뜻밖이라고 말했다. "너가 어떤 그림을 고를지 무척 궁금했는데 뜻밖이네." 색채의 마술사 샤갈의 그림 중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어찌 그것 하나일까. 다만 그때는 그 그림이 가장 내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그 비스듬한 귀향과 노스탤지어에 때문에. (후에 정말 뜻밖에 세상을 떠난 그가 고통 속에서 남긴 마지막 그림도 역시 더욱 밝고 열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색감의 그림이어서 나를 더욱 감동시켰다.)
그 친구 말이 맞다. 지극 당연한 말이다.
나도 봄이 되면 꽃들 속에서 환하게 살아나는 내 몸과 마음을 생생하게 체험하니까. 맞는 말이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에서 뜨거운 열정의 계절을, 지금을, 현재를 맘껏 누리고 취해야지 왜 곧 찾아올 긴긴 가을과 겨울을 미리 기억하려 하는 것일까. 이상할 수밖에.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발견하는 그 죽은 잎이나 꽃은 여름을 잊는다던가, 현재를 누리지 못한다던가 하는 마음과는 무관한 것이다. 어둠을 기억하지 않는 빛의 감사가 있을까? 죽음을 망각한 삶의 감사와 환희가 있을까? 그리고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여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죽어서도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명 속에 소외된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 웃음 뒤에 숨겨진 아픔을 기억해주고 알아주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생명을, 꽃을, 초록을, 삶의 봄과 여름을 감사하며 누리는 나의 방식이라면 이상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