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에 해당되는 글 7건
고난주간 -the Passion of Christ
![]() 무언가를 정의하는 것은.... & 바스키아 ![]()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 An Ode to what is Best for Us (or not) | 2025.04.10 아픔을 피하려다 웃음까지 잃어버렸다- 고통의 재인식 | 2025.04.10 적막한 봄 - 정완영 | 2025.04.08 존재의 크기, 문제의 크기: 걸리버 되기 4 | 2025.04.04 고난 주간을 맞아 다시 이 그림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 아주아주 오래전 건축공학 전공이던 딸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이제는 뉴욕에서 사물디자인과 AI분야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딸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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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efine is to kill - L. Pirandello]
기자가 바스키야에게 물었다.
"그림 안에 있는 이 글자를 해석해 주시겠소?"
"해석이요? 그냥 글자에요."
"압니다. 어디서 따온 거죠?"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봐요.
....당신은 어디서 말을 따옵니까?"
"나의 음악을 듣고 세상은 말했다. 이건 끔찍한 소음이군
내 음악은 세상에 통하지 않았다. 낯선 불협화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음악 발전에 걸림돌이라 생각한다."
ㅡCharles Ives
내가 좋아하는 작가 피란델로(Luigui Pirandello)도 말했다
ㅡTo define is to kill.( 무언가를 정의 내리는 것, 무엇이라 규정 짓는 것은 살인이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나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 판단과 이기적인 관점으로 규정 짓고 정의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박제화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살인이나 다름 없다. 너무나 공감하는 말이다.
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고.
그래서 또 잊지말고 침묵과 기다림과 겸손을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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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epollas (here only for therapue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도망쳐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업이 되어버린 적은 없었나요?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는 “기다림은 아픔이다. 잊는 것도 아픔이다. 하지만 둘 중에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중략.......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중에서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덜 아프다: 나는 기다립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오지 않는 그대를. 지친 나그네 바람이라도 머물다가겠지, 그렇게 위로하며 오늘도 마음의 문 앞에 의자 하나 내어 놓습니다. 맘 편히 쉬었다 가라고 가만히 문을 닫아놓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궁금하다면, 혹시라도 나를 기억한다면 문을 두드리리라, 그렇게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그 의자를 치워야 할까요? ...................... 우리가 진정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 욕구처럼 때로 변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인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성공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가 진실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다려봐야 알 수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림을 계속하는 것,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기다림은 질문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답이 없어도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질문은 대상을 향한 나의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자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기다림처럼 아직은 이해할 수 없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성실한 의지이며 희망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다림을 통해 만나는 것은 ‘그’가 아닌 나 자신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다림은 질문처럼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최초의 질문이나 최초의 기다림의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면서 기다리던 내 마음이 차차 호수처럼 잠잠해지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참으로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쓸쓸한 아픔입니다.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작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형기, <호수>)입니다. < 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린다" 중에서>
------- 올 한 해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나는 또 그 무엇을 기다리며 한 걸음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까요? 골똘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치지 말자고. 포기하지 말자고. 너무 외로워하지도 말자고.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이 박사님,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아닌지에 대한 찬가>
당신의, 그들의, 그녀의, 그리고 그의 우리의 투쟁으로 가득한 삶의 여정에 대한 이미지들, 사진들, 이야기들 마음에 상처가 된 피아노 레슨 또는 패배한 체스 게임을 통해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기꺼이 받아들이려 분투하는 이야기 그리고 유대감의 “빛” 속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밝고 어두운 빛의 미스테리를 풀어주었죠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정말 많은 것을 함께 나눠 주셔서 마음 속 깊은데서 우러나는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의 이야기에, 당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서사에, 마치 아리아드네가 우리를 이끌듯이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탐구여정에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치유, 사랑, 평화의 정신으로진심어린 축복으로, 비아테 ------- Dear Dr. Lee,
All My Best...
우리의 깊은 내면의 진정한 나를 찾아 밖으로 이끌어주는 문학치료/글쓰기의 힘을 이야기한 제목이었다. 영화와 시를 활용했고 정말 많은 교수, 상담사, 치료자등 많은 전문가분들이 먼 한국에서 문학치료를 공부하기 위해 왔던 낯선 사람, 나의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그리고 평가에서 지난번 세미나때처럼 모두 최고 점수를 주셨었다.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아픔을 피하려다 웃음까지 잃어버렸다 - 고통의 재인식 (Ⓒ2011이봉희)
어느 여름날, 난(蘭)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꽃을 피우던 난이 겨울이 되자 어느새 가지가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만 손을 놓아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겨울이 지나도록 볕 좋은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버린 가지를 달고 있는 뿌리가 새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피어오른 줄기가 말라버리자 어느새 뿌리는 그 곁으로 하나의 새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나봅니다. 말라버렸다고 줄기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뿌리 채 뽑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은 꽃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는 가지에도 새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는 뿌리의 생명력이 있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 - 이해인 <꽃이 필 때> 중에서
살아 있으니 아픈 것이다 아픔은 선인장의 가시처럼 생명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박경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20년간 《토지》를 쓰면서 참 힘든 일도, 고통스런 기억도 많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경리 씨는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산다는 게 고통 아닌가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지 않나요? 내 생각엔 생명이 있다는 자체가, 산다는 게 고통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은 앓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앓음 알음’이라는 것, 앓아가면서 알아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을.
괴테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색채들은 빛의 고통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아픔 없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도 나는 사는 동안 뜨겁게 타오르는 노을과 시린 새벽빛과 소나기 뒤의 그 장엄한 하늘빛을 보면서 한 번도 빛의 고통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묘한 빛깔의 많은 꽃들을 보며 감탄만 했지, 그것을 피워내는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책상 앞에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픈 걸까?”라고 써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프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도 우주도 그 모든 생명은 아픔과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픔으로부터 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고자 모든 느낌을 차단합니다. 마취제를 맞으면 아픔이야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마취된 시간 동안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분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던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의식이 또렷해서 의사들의 메스소리가 들리는데, 자신의 몸에서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자신이 온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마취제는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약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취 상태로 있다가는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다가 의식마저 무감각하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사령(死靈)> 중 한 구절을 중얼거려봅니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김수영, <사령> 중에서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살아 있다는 감사한 깨우침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이건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은 오히려 살아 있다고, “깨어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온몸의 아우성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통스런 기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는 고통뿐 아니라 생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까지 함께 차단합니다. 그럼으로써 타인에 대한 깊은 친밀감과 사랑, 신뢰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어기제는 우리의 깊은 내면을 감옥으로 만들어 우리의 참자아를 고립시킵니다. 딸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때 쓴 가슴 아픈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다가 이제 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내가 진 거야.”
아픔을 아파하지 마세요. 아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아픔과 절망의 끝에서 어느 날 활짝 터지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고치를 벗어난 나비처럼 영롱한 빛으로 날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만의 아름다운 색깔로 세상을 그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 순간 왜냐고 묻던 모든 항거와 의구심의 무게는 꿈처럼 가볍게 흩어져버리겠지요. 그때 우리는 조용히 웃음 지으며 끄덕일 것입니다. 왠지 몰라도 이제는 문제되지 않으며, 이제는 고백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게 다 협력해서 선한 결과를 이루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픔의 순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겠지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름 없이 피고 지는 꽃들과 내 아픔을 함께 느끼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사랑이 내 곁에 함께 존재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이 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겠지요. 아프지만 나는 아픔보다 더 용감했다고 말입니다. Ⓒ2011이봉희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적막한 봄 - 정완영 (1919~2016)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존재의 크기ㅡ소인국에서 거인으로 살기 (©이봉희 2011)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의 여러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이라는 저서를 통해 철학의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하나의 발견과 발명으로 눈에 보이는 변화와 사람들의 삶에 실용적 유익을 가져오지만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모든 확실하고 과학적인 답을 찾은 질문들이 학문(science/과학)화 되고 난 후 잔재된 답이 없고, 비실용적인 질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소멸한 후 함께 소멸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왜 불행할까, 왜 인간은 실존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쪼개듯 쓸데없어 보이며 답도 없는 이런 질문들은 인간의 존재와 삶의 궁극적 가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결국 인간을 변화시키는 간접적인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답이 없어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해야 하고, 그 질문에 대한 생각을 멈춰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앎이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생각처럼 우주를 인간 이성과 지식의 한계 속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참된 앎이란 “자아(사고의 주체)와 비자아(사고의 대상)와의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고의 대상이 광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상의 세계를 뛰어넘는 보다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할 때, 우리는 그 거대한 문제와 “하나가 되어” 자아가 확대됩니다. 이런 “자아의 확대(enlargement of self)”야말로 철학의 궁극적인 선(ultimate good)이며 가치라는 것입니다.
[자아의 확대, 거인되기] 어떻게 문학이 문제 해결과 자아 성장으로 이끄는 치료적 힘을 지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문학의 선(善)과 가치도 철학처럼 우리를 보다 더 큰 존재로 확대해주고 성장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도 철학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만 문학은 동일한 질문들을 통해 좀더 시적(詩的)으로 세계의 광대함과 아름다움, 생의 수수께끼에 다가갑니다. 문학의 치료적 힘은 무엇보다 문학 속의 시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옵니다. 시란 인간 조건에 대한 특별한 언술이지요. T. S.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의 삶은 대부분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이기 때문에 시는 때로 보다 더 심오한 이름 없는 감각들을, 우리 존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름 없는 느낌들을 우리가 좀더 잘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해주곤 합니다. 문학수업을 듣고 문학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얻었는가에 수업을 잘했는지 아닌지 초점을 두지 말고 내 생각의 눈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살펴보라고. 즉, 문학을 통해 내 생각에 자극을 받고 그 생각이 조금이라도 확대되었는지,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커져서 자연과 사물,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이런 자아의 확대를 우리가 ‘거인이 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학이 갖는 치료의 힘을 '소인국의 걸리버론'이라고 부릅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 소인국 릴리푸트 이야기는 동화로도 각색되어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를 소인국 사람들이 아무리 결박해도 그는 떨치고 일어납니다. 소인국끼리 전쟁이 났을 때도 걸리버는 수없는 화살에 맞습니다. 하지만 아프고 상처가 나더라고 그는 쓰러지거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소인국 릴리푸트에서 걸리버로 살아가는 게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며 치료입니다. 어른이 되면 아이가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더 이상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서로 다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와 싸우는 어른은 아이처럼 너무나 작은 소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 더 크게 내 존재를 키우기] 에리히 프롬은 <현대 인간의 조건Present Human Condition>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참으로 인간다워질 때 우리의 문제는 “원래의 크기대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제의 원래 크기는 작은 것이었다는 아주 적절한 지적입니다. 거인이어야 하는 우리가 소인으로 살아가면 같은 문제라도 커다란 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거인으로 성장한다면, 즉 내가 회복된다면 그 산처럼 보이던 돌(문제)은 내가 쉽게 들어서 치울 수 있는 작은 돌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갈 길을 가로막거나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상대방이 변화하거나, 세상이 바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상대가 바뀌어도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변화하면 상대와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문제 해결이 반드시 내 밖의 조건이 바뀌어야만 가능하다면 세상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고문하고 가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유롭기를 원하면 나 스스로 ‘자유인’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인이 되면 감옥에 갇혀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가 자유인이 되기 전에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외부 조건에 의해 내게 자유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흥미롭게도 감옥에서 고통을 받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자유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에밀리 디킨슨도 말합니다. 자유도, 나를 스스로 고문하고 가두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이 판단하기 마련이라고. “나의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고문대도 나를 고문할 수는 없어 내 자유로운 영혼을 이 죽음으로 사라질 뼈 뒤에 더 담대한 뼈가 숨어 있으니
톱으로 켤 수도 없고 커다란 칼로 찌를 수도 없지 두 몸이 함께 존재하기에 하나를 묶으면 또 다른 하나는 날아가니
독수리도 당신보다 더 쉽게 자신의 둥지를 떠나 하늘을 얻지는 못하리라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고문하는 적이 아닌 한 당신을 가두는 것은 의식이다 자유도 그렇다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어떤 고문대도 나를>
[상대가 아닌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독성적 관계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그 누군가와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저널치료사인 카파키오니(Capacchione)는 ‘독성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사람, 내 안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기운을 빼앗는 사람, 내가 못났다고 끊임없이 자책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말 한 마디로 내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내 안의 의심과 두려움, 자기 비난이 스스로를 사로잡게 만듭니다. 많은 경우 그런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이나 직장 동료일 때가 많습니다. 피할 수 없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에게 아무리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말해도 좀체 달라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느 삼십대 대학원생은 시어머니와 9년 동안 고통스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어머니는 그냥 상냥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과 함께 혼수 문제로 며느리에 대한 불만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친정부모에 대한 비난까지는 참겠는데, 손자들까지 미워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그녀는 9년간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녀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쌓여만 갔던 상처도 5년쯤 지나면서부터는 무뎌졌고 상처투성이였던 가슴도 절대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로 묻어두었다. 하지만 잊었다 싶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들었던 부정적인 언어들을 내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 내 거친 모습을 보며 놀랐다. “넌 생각이 있니 없니? 네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뭔데?” 그렇게 날 왜소하게 만들었던 언어들을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 자신도 싫고 어머니도 미웠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그것도 남이 아닌 내 가족에게……. 문학치료 시간을 통해 무겁게 엉켜버린 그 실타래가 언젠가는 내가 풀어야 할 숙제며 그 때가 바로 지금이란 걸 깨달았다. 내게서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분노 그리고 내게 행해진 ‘폭력’은 내가 잊었다고 착각하며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 상처와 분노와 폭력을 가장 사랑하는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저널기법을 사용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대화하고, 관점을 바꿔보며 3개월간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9년이나 고통 받던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용서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그녀 혼자 용서한 것뿐인데 시어머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년 후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놀랍게도 9년 동안 가슴 한쪽에 무겁게 짓누르며 아파했던 상처 덩어리가 언젠가부터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미움도 아픔도 없이 가벼워진 맘을 느낄 수 있다. 그 후론 어떠한 일에도 어머니와 싸워본 일이 없다. 서로 진정한 마음이 오가면서 시어머니는 내게 딸처럼 생각하고 대하겠다는 다짐까지 해보이셨다. 신기한 것은 글쓰기치료를 배울 때 교수님께 들은 것처럼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의 성격은 그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이다. 내가 달라지니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해묵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문학치료에서 관계의 치료는 상대가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함으로 시작된다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즉흥적인 표현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관계가 회복되니 상처받는 일도 드물다. 그보다는 하나 더 챙겨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시어머니의 맘이 느껴질 뿐이다.
[거인처럼 이기는 삶을 살기] 세상에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 말의 ‘ou(not, 아니다)’와 ‘topos(place, 장소)’가 합해진 말로 ‘no place’, 즉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즉 고통과 문제가 없는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향일 뿐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스런 일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당연히 고통과 문제가 있기 마련이므로 다만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말합니다. 좁은 시야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인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나의 내면을 성장시켜서 세상을 이기는 걸리버로, 세상의 고통이 감당치 못할 거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출처: [내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생각속의 집)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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