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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크기ㅡ소인국에서 거인으로 살기 (©이봉희 2011)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의 여러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이라는 저서를 통해 철학의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하나의 발견과 발명으로 눈에 보이는 변화와 사람들의 삶에 실용적 유익을 가져오지만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모든 확실하고 과학적인 답을 찾은 질문들이 학문(science/과학)화 되고 난 후 잔재된 답이 없고, 비실용적인 질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소멸한 후 함께 소멸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왜 불행할까, 왜 인간은 실존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쪼개듯 쓸데없어 보이며 답도 없는 이런 질문들은 인간의 존재와 삶의 궁극적 가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결국 인간을 변화시키는 간접적인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답이 없어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해야 하고, 그 질문에 대한 생각을 멈춰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앎이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생각처럼 우주를 인간 이성과 지식의 한계 속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참된 앎이란 “자아(사고의 주체)와 비자아(사고의 대상)와의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고의 대상이 광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상의 세계를 뛰어넘는 보다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할 때, 우리는 그 거대한 문제와 “하나가 되어” 자아가 확대됩니다. 이런 “자아의 확대(enlargement of self)”야말로 철학의 궁극적인 선(ultimate good)이며 가치라는 것입니다.
[자아의 확대, 거인되기] 어떻게 문학이 문제 해결과 자아 성장으로 이끄는 치료적 힘을 지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문학의 선(善)과 가치도 철학처럼 우리를 보다 더 큰 존재로 확대해주고 성장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도 철학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만 문학은 동일한 질문들을 통해 좀더 시적(詩的)으로 세계의 광대함과 아름다움, 생의 수수께끼에 다가갑니다. 문학의 치료적 힘은 무엇보다 문학 속의 시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옵니다. 시란 인간 조건에 대한 특별한 언술이지요. T. S.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의 삶은 대부분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이기 때문에 시는 때로 보다 더 심오한 이름 없는 감각들을, 우리 존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름 없는 느낌들을 우리가 좀더 잘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해주곤 합니다. 문학수업을 듣고 문학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얻었는가에 수업을 잘했는지 아닌지 초점을 두지 말고 내 생각의 눈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살펴보라고. 즉, 문학을 통해 내 생각에 자극을 받고 그 생각이 조금이라도 확대되었는지,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커져서 자연과 사물,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이런 자아의 확대를 우리가 ‘거인이 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학이 갖는 치료의 힘을 '소인국의 걸리버론'이라고 부릅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 소인국 릴리푸트 이야기는 동화로도 각색되어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를 소인국 사람들이 아무리 결박해도 그는 떨치고 일어납니다. 소인국끼리 전쟁이 났을 때도 걸리버는 수없는 화살에 맞습니다. 하지만 아프고 상처가 나더라고 그는 쓰러지거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소인국 릴리푸트에서 걸리버로 살아가는 게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며 치료입니다. 어른이 되면 아이가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더 이상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서로 다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와 싸우는 어른은 아이처럼 너무나 작은 소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 더 크게 내 존재를 키우기] 에리히 프롬은 <현대 인간의 조건Present Human Condition>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참으로 인간다워질 때 우리의 문제는 “원래의 크기대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제의 원래 크기는 작은 것이었다는 아주 적절한 지적입니다. 거인이어야 하는 우리가 소인으로 살아가면 같은 문제라도 커다란 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거인으로 성장한다면, 즉 내가 회복된다면 그 산처럼 보이던 돌(문제)은 내가 쉽게 들어서 치울 수 있는 작은 돌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갈 길을 가로막거나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상대방이 변화하거나, 세상이 바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상대가 바뀌어도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변화하면 상대와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문제 해결이 반드시 내 밖의 조건이 바뀌어야만 가능하다면 세상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고문하고 가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유롭기를 원하면 나 스스로 ‘자유인’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인이 되면 감옥에 갇혀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가 자유인이 되기 전에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외부 조건에 의해 내게 자유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흥미롭게도 감옥에서 고통을 받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자유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에밀리 디킨슨도 말합니다. 자유도, 나를 스스로 고문하고 가두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이 판단하기 마련이라고. “나의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고문대도 나를 고문할 수는 없어 내 자유로운 영혼을 이 죽음으로 사라질 뼈 뒤에 더 담대한 뼈가 숨어 있으니
톱으로 켤 수도 없고 커다란 칼로 찌를 수도 없지 두 몸이 함께 존재하기에 하나를 묶으면 또 다른 하나는 날아가니
독수리도 당신보다 더 쉽게 자신의 둥지를 떠나 하늘을 얻지는 못하리라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고문하는 적이 아닌 한 당신을 가두는 것은 의식이다 자유도 그렇다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어떤 고문대도 나를>
[상대가 아닌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독성적 관계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그 누군가와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저널치료사인 카파키오니(Capacchione)는 ‘독성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사람, 내 안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기운을 빼앗는 사람, 내가 못났다고 끊임없이 자책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말 한 마디로 내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내 안의 의심과 두려움, 자기 비난이 스스로를 사로잡게 만듭니다. 많은 경우 그런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이나 직장 동료일 때가 많습니다. 피할 수 없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에게 아무리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말해도 좀체 달라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느 삼십대 대학원생은 시어머니와 9년 동안 고통스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어머니는 그냥 상냥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과 함께 혼수 문제로 며느리에 대한 불만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친정부모에 대한 비난까지는 참겠는데, 손자들까지 미워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그녀는 9년간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녀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쌓여만 갔던 상처도 5년쯤 지나면서부터는 무뎌졌고 상처투성이였던 가슴도 절대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로 묻어두었다. 하지만 잊었다 싶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들었던 부정적인 언어들을 내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 내 거친 모습을 보며 놀랐다. “넌 생각이 있니 없니? 네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뭔데?” 그렇게 날 왜소하게 만들었던 언어들을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 자신도 싫고 어머니도 미웠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그것도 남이 아닌 내 가족에게……. 문학치료 시간을 통해 무겁게 엉켜버린 그 실타래가 언젠가는 내가 풀어야 할 숙제며 그 때가 바로 지금이란 걸 깨달았다. 내게서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분노 그리고 내게 행해진 ‘폭력’은 내가 잊었다고 착각하며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 상처와 분노와 폭력을 가장 사랑하는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저널기법을 사용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대화하고, 관점을 바꿔보며 3개월간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9년이나 고통 받던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용서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그녀 혼자 용서한 것뿐인데 시어머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년 후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놀랍게도 9년 동안 가슴 한쪽에 무겁게 짓누르며 아파했던 상처 덩어리가 언젠가부터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미움도 아픔도 없이 가벼워진 맘을 느낄 수 있다. 그 후론 어떠한 일에도 어머니와 싸워본 일이 없다. 서로 진정한 마음이 오가면서 시어머니는 내게 딸처럼 생각하고 대하겠다는 다짐까지 해보이셨다. 신기한 것은 글쓰기치료를 배울 때 교수님께 들은 것처럼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의 성격은 그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이다. 내가 달라지니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해묵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문학치료에서 관계의 치료는 상대가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함으로 시작된다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즉흥적인 표현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관계가 회복되니 상처받는 일도 드물다. 그보다는 하나 더 챙겨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시어머니의 맘이 느껴질 뿐이다.
[거인처럼 이기는 삶을 살기] 세상에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 말의 ‘ou(not, 아니다)’와 ‘topos(place, 장소)’가 합해진 말로 ‘no place’, 즉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즉 고통과 문제가 없는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향일 뿐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스런 일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당연히 고통과 문제가 있기 마련이므로 다만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말합니다. 좁은 시야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인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나의 내면을 성장시켜서 세상을 이기는 걸리버로, 세상의 고통이 감당치 못할 거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출처: [내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생각속의 집)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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