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피천득>

짐승들 잠들고
물소리 높아지오

인적 그친 다리 위에
달빛이 짙어 가오

꺼리낌 하나도 없이
잠 못 드는 밤이오
—————-

사방이 천지가 눈감고 자는 밤
잠 못 드는 시인은
그게 거리낌 하나 없다고
말한다.

늦게 잔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일도 없어 초조할 것도 없는,
누구에게 폐 끼칠 일도 없는
자유로움.
물소리, 달빛에 젖어
유유자적한 듯 말하는 그 목소리에 밴
쓸쓸함은 무엇일까?

홀로 잠 못 드는 밤을 보내는
사람은 알까
거리낌 없음의
뒷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하오
말을 건네고 있는
그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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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 修羅 -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1936년 시집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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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 

동대문구 가족센터: 이혼 후 치유와 성장을 위한 집단 글쓰기문학치료 
[나는 내 편이 되기로 했다] 

(출처: 동대문구가족센터)

귀국할 때를 기다려주신 주관처, 특히 공진영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공진영선생님은  오래전 나의 집단문학치료모임에 참여하셨던 분으로 글쓰기치료로 논문을 쓰셨던 것을 기억한다. 
매시간 눈물을 흘리시던 참여자분들 한 분  한 분의 내면 깊은 목소리들이 늦은 밤에 마음 깊은 울림을 주셨었다. 

그 후 이 모임을 계속하고 싶은 분들이 연락을 주셔서 다시 4회를 만났었다.  소그룹이 모이니 더 깊은 공감과 상호작용이 가능했다. 

각자에게 적합한 글쓰기기법을 활용해 드리니 더 많은 눈물과 정서적 통찰과 깨달음과 희망을 얻게 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아쉽게 다시 출국해야 해서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저널을 쓰시면서 스스로를 돌보실 힘을 얻으셨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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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없이 눈이 내린다

이만큼 낮은 데로 가면 이만큼 행복하리

 

살며시 눈감고

그대 빈 마음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는 눈

 

곧 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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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3- 김용택                                   


바람 타고 눈이 내린다
이 세상 따순 데를 아슬아슬히
피해 어딘가로 가다가
내 깊은 데 감추어 둔
손 내밀면
얼른 달려와서
물이 되어 고이는
이 아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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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 한마디- 김지하]

 

    새해에는 빛 봐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샘물 넘쳐흘러라
    아이들 싱싱하게 뛰놀고
    동백잎 더욱 푸르러라
    몰아치는 서북풍 속에서도
    온통 벌거벗고 싱그레 웃어라
    뚜벅뚜벅 새벽을 밟고 오는 빛 속에
    내 가슴 사랑으로 가득 차라
    그 사랑 속에
    죽었던 모든 이들 벌떡 일어서고
    시들어가는 모든 목숨들
    나름나름 빛 봐라
    하나같이 똑 하나같이
    생명 넘쳐흘러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빛 봐라
    빛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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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 폭설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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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그 눈들의 "남은 시간," ㅡ 그것이 차마 고통스러 힘들어했었습니다. 이 땅의 때묻음, 세상의 나약함은 덮는다고 가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녹지 않는 눈 같은 환상이라도 있어 내 눈을 덮어주길 바란 것일까요? 어둠에 그을린 세상을 온몸으로 덮고 함께 녹아 길에 쓰러져 그 최후를 맞이하는 눈...그것을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 겨울에는 질척이는 외롭고 응달진 골목을 걸을 때 그 속에 함께 녹아 내린 희디 흰 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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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카드 - 정영>

 

귓속에서 누군가 우네

 

나, 눈 내리는 카드에서 걸어나와

 

봉투를 닫네 

등불을 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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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하나 -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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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골짜기- 조향미

가슴 수북이 가랑잎 사이고
며칠 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둔 씨앗 몇 개의 화두(話頭)
폭폭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깊이 어두워지리.

photo by bh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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