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희망은 의지의 문제다

- 긍정적 의지

 

 

우리는 기쁨이나 희망, 감사나 사랑 등을 모두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정입니다. 하지만 감정 이상의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기쁨이 마냥 샘솟듯 솟아나오는 감정일 뿐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당황하게 될까요? 기뻐할 일보다 좌절하고 낙담할 일이 훨씬 더 많으니 말입니다. 기쁨은 순간일 뿐이고 슬픔은 영원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시인 하진은 슬픔을 인생에서 유일하게 영원히 살아 있는 물줄기라고 말했을까요.

만일 사랑이 단지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하거나 상대를 애틋하게 느끼게 하는 감정일 뿐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덧없이 짧은 사건일까요. , 감사하는 마음이 단지 그 조건과 이유가 있을 때만 우러나오는 감정일 뿐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감사할 일이 적어질까요. 그 감사의 조건은 또 얼마나 주관적이며 이기적일까요. 브레히트가 경험했듯이 때로 운이 좋았다고 감사하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질 수도 있고, 그 감사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로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던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Ich, der Überlebende>

 

기쁨과 희망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힘겨운 노력

 

오래전, 힘든 시간을 보내던 딸아이는 한 가닥이라도 좋으니 희망의 빛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엄마, 오늘 친구가 내게 생일선물로 뭐 갖고 싶은지 물었어. 그래서 내가 희망이 있다는 증거 한 가지라도 갖고 싶다고 말했어.”

그러자 아이의 친구가 말했다고 합니다.

가끔 내가 희망이 없어지고 삶에 대해 회의적일 때마다 난 네 안에서 희망을 보고 힘이 나곤 해. 그렇게 가끔은 네 안의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시더라.”

딸아이가 다시 내게 말했습니다.

엄마, 누군가가 나처럼 회의와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돼.

 

기쁨이나 감사,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의 힘겨운 노력이자 의지이며 지혜입니다 "모든 지혜는 두 마디로 요약된다. 기다림과 희망이다"라는 A. 뒤마(Duma)의 말이 기억납니다. 생태주의 작가 바버라 킹솔버(Barbara Kingsolver)는 최악의 날들에 절망의 잿빛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찬란한 사물"을 골똘히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때 바라본 찬란한 사물은 빨간 제라늄 꽃이었고, 노란 원피스를 입은 어린 딸이었으며 초승달과 광활한 밤하늘이었습니다.

 

내가 다시 삶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나는 그것들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뇌졸중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는 몸의 기능을 회복하려고 두뇌의 새로운 부분을 훈련시키듯이 나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에게 기쁨을 가르쳤다. (킹솔버투손의 만조에서)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복적으로자신에게 기쁨을 가르쳤습니다.’ 킹솔버는 이것을 마치 마비된 두뇌의 새로운 부분을 훈련시키는 것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비유가 있을까요? 릴케는 우리 슬픔의 대부분은 마비된 순간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새처럼, 절망한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마비된 상태입니다.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 천상병, <3> 중에서

 

이처럼 절망한 사람들은 절망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움직이지 못합니다. 심연이란 말은 독일어로 압그룬트(Abgrund)’, 즉 존재의 기반을 잃어버린, 또는 삶의 이유를 상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이 그 어디에도 없는 부재중이라고 여겨지는 것, 이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그래서 여림 시인의 말대로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라고 호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기뻐하는 법을 가르치기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작가 빅터 프랭클이 유태인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있었을 때입니다. 한 작곡가가 희망에 찬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달 후면 모든 게 끝날 거야. 꿈을 꿨는데 다음 달 330일에 독일군이 항복했거든." 하지만 330일이 되어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러자 시름시름 앓던 작곡가는 그만 바로 다음 날인 1945331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지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54, 히틀러는 자살을 하고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수감자들을 보면서 누구보다 체력이 뛰어나고 민첩하게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한 사람들이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놀랍게도 겉보기에는 나약하고 어수룩해 보여도 붉은 노을의 장엄함과 동료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 들꽃 같은 아주 작은 것에 감탄하는 사람들, 그리고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도 병든 동료에게 자신의 음식을 기꺼이 나눠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어떤 최악의 조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의지와 노력으로 절망의 심연에서 마비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기뻐하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한 인간 영혼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은 삶의 의미와 희망은 생의 작은 것에서 찬란함을 찾아내어 감탄하는 따뜻한 감성과 강한 긍정적 의지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스스로 삶의 의미와 살아갈 이유를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프랭클은 최후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감사와 기쁨, 희망과 사랑을 느낄 수 없다고 절망할 때, 그것들이 자연스런 감정 이상의 의지이자 노력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안개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그 한가운데서 포기하지 않고 기뻐하는 능력을 나 자신에게 가르치겠습니다. 그것이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는 눈을 기르는 일처럼, 내 작은 손바닥에 무한을 담는 것처럼 놀랍고 멋진 일임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싶습니다- 반복적으로!

 

(c)이봉희 / 출처: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생각속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