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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중에서
너무 어렵게 말하지 말자- 과도한 자기연출
“왜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당황해할까요? 왜 나는 화를 내면 안 될까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나의 분노에 불을 지핀 그들은 아무도 비난받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분노하면 사람들은 괴물이라도 바라보듯 놀라서 나를 쳐다봐요. 그들이 소리 없는 총을 쏘았다면, 나는 소리 나는 총을 쏘았기 때문일까요? 나는 그들의 그 철가면 같은 얼굴이 두려워요. 그러면서 왜 나는 그들처럼 사회성이 없을까 하는 깊은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문학치료에 참여한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분노하는 대상들처럼 오늘도 우리는 계산된 말과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얼마나 성공했을까요? 오늘날은 금연, 금주, 다이어트, 감정표현의 자제 등 욕구의 억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페니베이커(Pennebaker) 박사는 억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몇 가지 남지 않은 흥미로운 일들 중 하나는 우리의 충동을 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일이다. 이제 새로운 자기 독선의 시대가 도래했다.”
타인을 의식하며 타인을 사는 우리들 요즘 우리가 부러워하는 처세술 중 하나가 바로 포커페이스(poker face)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 변화를 상대에게 읽히지 않고 방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에는 어진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이런 교언영색(巧言令色)도 화려한 말과 얼굴 속에 자신의 진심을 숨긴다는 면에서 포커페이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말끝마다 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면 말의 끄트머리를 꼭 웃음으로 포장할까요?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 그렇게 웃는 걸까요? 이런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진솔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세련되지 못하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어떤 분은 직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 때, (짠지 싱거운지) “간을 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소설가 온다 리쿠의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으면 그걸 보고 있던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는 법이다. 멋진 일에 가슴이 설렐 때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따위 시시한 것' 하고 속삭인다. 그렇게 해서 까치발을 하다가 주저앉고 손을 내밀다가 뒤로 빼고 조금씩 뭔가를 포기하고 뭔가 조금씩 차갑게 굳어가면서 나는 어른이라는 '특별한 생물'이 될 것이다. - 온다 리쿠, 《굽이치는 강가에서》 중에서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비웃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모뿐만 아니라 목소리마저 모두 짙은 화장으로 감춘 채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 가면 뒤에서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귀는 이미 마비된 지 오래입니다. 성공의 기준도, 행복의 기준도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환상 속에 삽니다. 말과 행동뿐 아니라 내 생각까지도 세상의 저울에 달아서 계산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화장을 지우고 맑은 거울 앞에 앉을 때면 점점 더 깊은 외로움과 대면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내 안의 진실을 외면하면서 얻은 대가는 바로 외로움과 단절감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와 ‘내’가 서로 등을 대고 앉아서 대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왕노의 시는 이런 우리 삶의 “빤한” 비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 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 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 김왕노, <사칭(詐稱)>
여기서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이란 말은, 내가 아닌 나로 사는 것, 즉 나의 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나의 진실한 내면을 외면한 채 타인의 눈에 맞춰서 다른 얼굴을 사칭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지 못하는 일, 그래서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삶은 스스로를 지치고 외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가면을 바꿔 쓰지도 못하는 자신을 비난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가면을 벗고 그 누구도 ‘사칭’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나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은 슬금슬금 나를 멀리합니다. 절망한 나는 또다시 새로운 가면을 골라잡습니다. 더욱 능수능란하게 가면을 쓰고는 또 다른 얼굴을 사칭합니다. 자신의 내면과 멀어진 나는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그러니 너무 어렵게 말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바보처럼 맨 얼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계산으로 상대에게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제 용기 내어 마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끄럼 없이 내 마음 속 감정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외롭다고, 슬프다고, 두렵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실패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당신이 필요하다고,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의 눈앞에서 외면했던 나 자신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점점 힘을 잃고 작아지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활짝 귀를 열고 싶습니다.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며 살지 말자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고 살자 - 강재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며 살지 말자> 중에서 @ 이 글과 관련된 글 | 덧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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