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 이형기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이 되어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차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photo by bhlee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섬- 정현종]

마른 풀잎 -유경환 (1936~2007)

  마른 풀잎 속엔
  엽맥(葉脈)의 질긴 기도가 남아 있다.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 소리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멈춘 그대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아름답게 날려 가며,
  세우던 고개는 떨어뜨렸으나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어떻게 지금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가를
  하늘이 하얗게 흙을 덮어 내리면
  알리라.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봄으로 미루는 부활을
  마른 풀잎 속엔
  기억해야 할 기도가 남아 있음을
  당신 한 분이라도
  당신 한 분이라도.

   - 1991년 시집 <노래로 가는 배> (문학아카데미)

눈오는 地圖(지도) ㅡ 윤동주 (1917~1945)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선생님과 할머니

2010. 3. 12 금.  

 

어제 언니가 내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 초저녁에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낮에도 전화 안 받고.... "
"언니 낮엔 당연히 없지. 학교에 가 있지."

"아. 어디 다녀온다고 했잖아. 중국출장." 

"응. 그건 엊그제 돌아 왔지. 그래서 어제 밤에 통화도 했잖아. " 

"아. 그랬나.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어." 

언니가 무료해서 낮에도 전화 했구나.....

"저녁 먹었어?" 언니가 묻는다.

"지금 먹으려고..". 막 식사를 끝냈지만 거짓말을 한다.

고속도로로 출퇴근 하는 학교에서 종일 복잡한 일로 지쳐 돌아온 밤,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주면 되는데,  간단한 대답 몇 마디만 해주어도 되는데 그것도 버거워 혼자 있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 그럼 어서 식사해. 밤낮 이렇게 한 밤중에 저녁을 먹으니 어떻게 해. "

"늘 그런데 뭐. 언니 이따가 또 잠 안 오면 전화해. 나는 2시에 자니까 걱정 말고."

"알았어."


이기적이고 못된 동생. 그냥 좀 들어주지.  어제 밤에 통화했다는 말은 뭐하러 해서 언니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전화를 끊고 후회를 한다. 
전날 밤 통화 때는 목소리도 멀쩡하고 기억도 또렷하더니 하루 사이 갑자기 다시 기억을 못하는 언니. 죽음의 고비를 2-3번 넘기고 겨우 중환자실에서 살아남은 언니. 하나뿐인 폐에 삽관을 하다가 구멍이 나서 잠시 산소공급이 끊긴 사이 두뇌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그 깔끔하고 총기 있던 언니가 3달 후 퇴원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 애기같이 변했다. 그리고는 머리에 새집을 짓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갇혀 지내고 있다. 온갖 병이 스쳐지나간 몸으로 한 쪽 뿐인 폐로 힘겹게 살았는데 그렇게 질곡 많은 생의 마지막을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장에 갇힌 어린 새처럼 살 것이다.

 

어제 언니와 통화한 일을 쓰다보니, 언니 때문인지 얼마전부터 떠오르던 기억이 있다. 

 

청주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전학 온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손영자선생님. 지금은 어디계시는지, 생존해계시기는 하시는지.... 오빠가 동생들을 다 학교 보내고 돌봐준다는 것에 감동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교회도 가시고(우리집은 불교집안이었는데)  늘 자신의 집에 데려가 주셨다. 선생님은 이혼인지 사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홀로 반신이 마비된 뼈만 남은 70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숙명여고 다니는 딸과 함께 3식구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예뻐 하셨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툭하면 선생님 댁에 가서 할머니 방에서 말동무 해드리면서 그 집에 있는 위인전기며 책들을 읽었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뺨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듯이 노인들의 뻣뻣한 살가죽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할머니 방은 중풍병자의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늘 깔끔하게 참빗으로 머리를 넘겨 쪽을 찌고 하얀 모시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계셨지만 방에서는 알 수 없는 고통스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모두 ‘학교 다녀 왔어요’ 하고 문 열고 한 마디 하고는 나가버리는 쓸쓸한 방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식구들의 발소리만 기다리셨을 텐데. 그런 할머니의 냄새나는 방에 나는 방학 때면 종종 찾아가 한 나절 곁에 앉아서 배 깔고 누워 책을 보았던 거 같다. 할머니는 그게 좋아서 나만 가면 마비되어 어눌한 입으로 우우 거리시고 기억자로 곱은 손으로 손짓을 하시고는 동그랗게 끝을 말아서 고리처럼 굽혀놓은 파리채 손잡이로 곁에 놓인 작은 장을 열고는 그 속에 있는 곶감이나 다른 먹을 것을 꺼내 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또 일하는 식모가 그만 두겠다고 한 것이다. 선생님은 친정어머니 방문 앞, 마당에서 어린 나에게 호소를 했다. “다 할머니 때문이야. 똥오줌 받기 싫어서 아무도 붙어 있으려 하질 않아.”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해야 하고,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고, 일할 사람은 오고 싶지 않다고 하고...... 선생님도 나름대로 삶의 서러움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남편도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좀 많았을까. 울음이라도 터질 듯 폭발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분노인지 절망인지 원망인지 설움인지 모른 심정을 초등학생 철부지 제자에게 호소하는 선생님과 방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실  할머니 사이에서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 가끔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선생님이 나를 늘 집에 데려가신 이유는 나를 이뻐하셔서이기도 하지만 빈집에 할머니 혼자 둘 수 없어서 나를 할머니 곁에 두고 외출하셨던 것 같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어리숙하고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어떤 땐 그 속이 다 보여도 그냥 속아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니까.  (영악스럽게, 아니면 자신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바보?)   내가 다음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학교 후배가 된 선생님의 딸은 얼굴에 주근깨가 약간 있었고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약간 통통하고 키가 컸던 언니로 기억이 난다. 내게도 잘해주었지만 살갑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할머니 때문에 귀찮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던 언니였었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다 빤히 눈치채고 계셨을 텐데 얼마나 외롭고 서럽고 또 구차했을까? 당신이 원해서 그런 병이 드신 것도 아닌데.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은 죽은 자와 방불한데 숨 쉬고 살아있는 수치심과 그럼에도 살고 싶은 맹목적인 욕망은 무엇이며, 아니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무기력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 홀로 미지의 세계로 사라지는 공포일까? 

 

잉여인간...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맘대로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이상하게 얼마전부터 그 할머니가 기억난다. 철없이 그냥 찾아와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집어주는 곶감을 먹어드린 것뿐인 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예뻐하시던 정에 주린 할머니의 외로움이, 그리고 철부지 초등학생 제자 앞에서 울음이 터질듯 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삶의 무게를 호소하시던 선생님의 고달픈 삶과 외로움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갑자기 그 선생님은 (어떤 의미로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길 바라셨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들 모두 속에서 나 자신의 여러 편린들을 본다.

 

2010.3.12. 금. 흐림. 바람이 심하다.

크리스마스를 위하여ㅡ김시태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희미한 고향집과 어머니
그 개구쟁이들
그들을 도로 돌려주소서
조그만 카드 속에 정성을 담던
그 소년들도 돌려주소서
첫아이 보았을 때 기도드리던
그 아빠와 엄마도 돌려주소서
아이들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성당을 찾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한 번 더 그 종소리 듣게 하시고
눈 내리는 아침을 걷게 하소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소서

잘 지내시나요?

 

How aren’t you?

 

내가 좋아하는 K. Rosen의 글 중에 나온 인사말이다.  How are you? 잘 지내시나요라는 인사를 바꾼 이 인사가 어쩌면 내가 받고 싶은 인사, 내가 하고 싶은 인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요즘 문득문득 이 인사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라는 “영혼 없는” 인사를 할 때마다 매번 진지하게 대답을 하려고 끙끙댄 적이 많았었다. 아프다고 하면 안될거 같고, 좋다고 하려니 거잣말이라 불편하고... 그러다 스스로 바보가 되거나 대놓고 웃음거리가 된 적도 많았다. '그냥 한 말에 뭐 그리 진지하게 답하세요~' 하면서 그들은 옆사람과 같이 날 보고 깔깔 웃었었지. 어떤 목사 교수는 내게 '고지식하신거 같아요' 라고도 했다. 

 

바로 좀 전에 만났던 사람에게 또 다시 몇 번씩 다시 받는 같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phatic communication, 즉 의미 없이 그냥 사교적으로 던지는 의례적인 언어라고 한다. 이건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답없이 동일한 질문을 한다. 질문이 아니므로 물론 누구도 이 인사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아주 힘겨운 날에도 굿모닝 하듯이.

 

그런데 요즘은 “잘 지내시죠?” “잘 지내지?” “건강조심하세요!”와 같은 이 의례적이고 평범한 인사가 온 마음과 진실이 담긴 가장 소중한 마음의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의미부재인 언어의 빈 공간에 ‘진심’을 담을 때 언어만 살아나는게 아니라 문득 상대와 나 사이도 의례적인 관계에서 ‘만남’이라는 의미있는 관계로 바뀌는 것을 희미하게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팀 켈러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아무도 스스로 선택해서 풀무불 같은 시련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시기를 거치지 않았으면 결코 깨닫지 못할 깨우침 얻는다.. 이것이 또한 고난 속에 숨은 선물이다. 고난은 우리의 연약함을 일깨워주고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인간의 본성은 강하고 독립적이길 원한다. 하지만 시련속에서는 그런 자아가 발붙일 여지가 없다. 이런 자아를 벗어버리면 다른 존재와 진정한 관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무엇보다 우리와 참으로 교재하기 원하시는 하느님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안부인사를 건네는 일이 일상이 된 요즘 문득 나 자신에게도 진심으로 물어본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의 안부를 물어주었으면.... 하고 쓸쓸한 날, 그런 누군가를 기다리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나에게 물어보는 일을 잊지 않으려한다. 

 

잘 지내니? 정말 너 잘 지내는 거야??

 

아니, 그렇게 묻고 계신, 안일한 일상에서는 들리지 않는 질문에 귀를 기울여 깨닫기를 기도한다.

참 대화 --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가 부재한 중언부언하는 의례적 기도가 이제야 말로 참으로 인격적 대화와 교제가 되는 기도가 되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한다.


ㅡㅡㅡㅡ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운 때는 속삭임으로 말씀하시지만 고통속에서는 고함소리를 내신다.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 C. S. 루이스

 

<데스마스크 Death Mask -허만하>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며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솔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