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노래와 둘째 언니

 

1960년대 초에는 오늘날처럼 학생의 우상이 되는 연예인은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10대 가수는 아예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듣는 노래는 가끔 오빠가 좋아하는 노래, “검푸른 저 산 넘어, 이슬이 석양빛에 소리 없이 사라져...(나중에야 그것이 영화 <셰인>의 주제가임을 알았다)“ 라든가 암으로 42살에 돌아가신, 살아 계셨다면 지금 70을 훨씬 넘기셨을 당시 영어 선생이던 멋쟁이 큰언니가 벚꽃 만발한 무심천 둑을 내 손을 잡고 거닐면서 불러주던 무언지 모를 영어노래들이 동요 말고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 중에 내가 열심히 따라하던 ”새드 무비(Sad Movies)"는 언니가 친절히 그 노래의 내용을 다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가수들이 영어와 섞어 불러서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히트시킨 노래였다.  

 

당시는 전등불을 시에서 일방적으로 켜주고 끄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밤마다 불이 '나가는' 시간이 통금처럼 정해져 있었다. 저녁 식사시간에 들어와서 11시인가 12시가 되면 불이 나갔다. 그래서 늘 어머니나 언니들은 불 나가기 전에 숙제하라고 종용을 하시곤 했었다. 불이 나가면 특히 밤이 긴 겨울이면 언니들과 촛불을 켜놓고 그림자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한 이불 속에 동그랗게 둘러서 누우면 둘째 언니는 어김없이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다 큰 초등학생 동생들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었을 리는 없고 아마 말로 표현 못한 가슴속의 무엇인가를 어둠 속에서 노래로 대신했었던 것 같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겨울은 가고 따스한 해가 웃으며 떠오고...” 한 시간정도 언니의 노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유난히 숨이 짧은 둘째 언니가 숨을 참아가며 어찌나 정성스럽게 부르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어쩌면 하나같이 어두운 밤 혼자 문밖에서 울다 가버리는 겨울바람처럼 쓸쓸하게 들리던지 나는 숨소리도 못 내고 옆에 누워 듣다가는 잠이 들고 했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말 못할 하소연이었다. 그 언니가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 멀리 나는 가야지,....말없이 나는 가야지” 하고 부를 때면 정말 내일 아침이면 어디로 가버리려고 몰래 보따리라도 싸 놓은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어서 졸린 데도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과 사명감에 끙끙대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그 언니는 결국 폐가 너무 나빠서 채 피지도 못한 20대 초반에 자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 “산장의 여인”처럼 요양소로 떠나야 했었다.  

 

큰오빠가 언니를 면회하러 가면 언제나 내가 보내준 편지(그때 내가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을 거다.)를 보면서 울고 있었다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언니는 그 곳에서도 의사 몰래(결핵 환자는 크게 웃지도 못하게 했었다.) 밤이면 [노래]를 불렀을 것 같다.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또다시 같은 노래 가락들 속에 실어서 “말없이 나는 가야지” 하고 불렀을 건 만 같다. 언니의 노래는 어쩌면 내가 책 한 권 내지 않으면서도 혼자서 항상 무언가를 끄적이는 독백의 습관과 어쩌면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그 언니가 너무 불쌍해서 학교 수업 중에도 혼자서 책 위에 눈물을 떨구며 소리없이 운 적도 많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았었다. "어머머 쟤봐 울어...."라고 나를 보고 깔깔대던 아이들의 소리가 기억이 난다.

 

언니는 요양원에서 20살 대학초년생 때 폐하나를 떼어냈다. 평생 온갖 병을 다 겪고, 암도 이겨내고, 늘 숨이 차서 고생하며 살더니, 10년 전 수술을 하고 그 와중에 또 하나밖에 없는 폐가 폐렴에 걸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몇 달간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견디더니 기적같이 고비를 넘겼었다. 의사도 포기했었기에 불사조라고 했다. 당시 무의식속에서 이 세상과 저세상을 오가며 겪는 영적인 싸움이 얼마나 무섭고 치열했던지 그 싸움을 할때는 몇일 사이에 완전 뼈와 가죽만 남기도 했었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남았는데 너무 지쳤는지 그 다음 해인가 뜻밖에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10년이 넘도록 치료를 받으며 그래도 잘 견디어왔다. 오랜 옛일은 나보다도 훨씬 더 총기있게 선명히 기억하는데 이제 점점 현재에서 뒷걸음질쳐가고 있다. 단기 기억이 눈에 띄게 나빠지는 요즘의 언니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직은 통화도 하고 이것저것 안부도 묻지만 조마조마 불안하기만 하다. 이젠 통화 중에 언니가 기억 못해도 스트레스 줄까봐 그냥 다 받아주고 있다.

 

몸이 약해 무척 예민하긴 했지만 항상 잘 웃고 긍정적이고 깔끔하고 음식솜씨며 살림이 야무지던 언니. 치매걸린 시부모님 두 분을 집에서 다 보살피던 언니.형부도 오래 전 암으로 떠나가시고 자녀도 없이 저렇게 언니는 20살 어린나이 요양소에 홀로 남겨졌을 때처럼 혼자 과거 속에 남겨지는 것일까? 그런 날이 올까봐 문득문득 그런 이별아닌 이별이 두렵고 눈물이 난다.

 

약한 몸으로 자기 때문에 동생들 결핵 걸렸다고 미안해하던 언니.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언니. 서울에서 서울대 이대 경기고 다니던 큰오빠 언니 작은오빠 뒷바라지 다 해주던 언니. 그리 해맑게 자신을 위한 욕심 없이 정말 열심히 사셨는데 삶은 끝까지 언니에게 자비롭지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생은 그런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자주 느끼는 슬픔은 생이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었다.

 

9/22/2010